1987년 새해는 혹독한 추위 속에 밝았다. 86년 한해 내내 이어진 수많은 투쟁의 여파로 민주화단체들은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그런 결과로 건국대 사태 당시에는 학생들을 옹호하는 성명서 한 장 발표할 단체가 남아 있지 않았다. 이 무인지경의 초토 위에서도 전두환 정권은 끊임없이 ‘ML당’ ‘반제동맹당’ 등 조직사건을 엮어냈다. 수사기관의 고문도 끊이지 않고 발생했다.

이 무렵 민주화 진영에서는 ‘이렇게 고문을 자행하다가는 저들이 필시 백일하에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말이 급속히 퍼져나갔다. 벌써 의문의 변사 사건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언론의 침묵으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 5공은 이미 고문 생지옥이었다.

그렇게 새해가 밝고 보름이 지났다. 1월15일자 중앙일보 사회면에 ‘경찰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평범한 2단짜리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기사의 파장은 컸다. 그날 밤 9시, 부검이 이뤄졌다. 그후 부검을 맡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과장 황적준은 물고문 도중 그 대학생이 질식사한 것 같다고 말했다. 황적준은 ‘사인을 심장마비로 해달라’는 경찰의 협박을 뿌리치고 의사의 양심을 지켰다. 저들이 고문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맞아떨어진 순간이었다. 어쨌거나, 이튿날인 16일 서둘러 화장된 대학생은 한줌 재가 돼 임진강의 찬바람에 날아가버렸다.

박종철.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광주사태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미 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당시 지지 시위로 구류 5일.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 시위 참여로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 언어학과 학생회장.

그는 1월13일 자정 무렵, 서울 신림동 하숙집으로 귀가하던 도중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 의해 세칭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된다. 아무런 합법적 절차도 없었던 불법 납치였다. 그는 각종 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수배된 학교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댈 것을 추궁받는다. 실은 박종운이 두 차례 그의 하숙집을 다녀갔지만, 그는 모른다고 잡아뗀다. 구타와 폭행에도 불구하고 그가 끝내 입을 열지 않자, 수사관들은 익숙한 솜씨로 고문을 시작한다. 그의 사지를 수건으로 결박한 다음 물이 가득 찬 욕조에다 머리 처박기를 반복한다. 이러한 물고문은 10여시간 지속된다.

14일 오전 11시쯤, 수사관들은 그가 숨을 멈춘 것을 발견하고 당황한다. 그들은 박종철이 사망한 것을 확인한 뒤 후환을 차단하기 위해 곧바로 증거를 인멸하고 서울지검에 시신 화장을 신청했으나 거절당한다.

신문 보도로 여론이 들끓자, 경찰은 17일 마지 못해 자체 수사에 들어갔고 곧 진상이라며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경찰이 박종철을 상대로 수사하던 중 책상을 ‘탁’ 치니 ‘억’ 하며 쓰러져 인근 중앙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그날 낮 12시쯤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유치하게 날조된 이 거짓말은 고문 의혹에 기름을 끼얹었다. 치안본부장 강민창의 발표문은 세간의 조롱거리로 회자됐다. 눈 뜨고는 차마 못볼 만행 앞에 그때까지 얌전히 정권의 나팔수 역을 하던 신문들이 의분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19일, 드디어 경찰은 물고문 사실을 자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됐고, 고문 경관 조한경과 강진규를 고문치사 혐의로 구속하기에 이르렀다. 야당은 자체 진상조사단을 구성해 정확한 사인 규명에 들어가고, 주력이 대부분 투옥된 상태의 민주화운동권은 종로5가 기독교회관과 명동성당에 다시 집결해 대책을 논의했다.

20일, 서울대생들은 추모제를 열었다. 인문대 총학생회가 중심이 돼 언어학과 사무실에 마련된 빈소에서 밤을 지새며 준비한 추모제였다.

“철아,/ 결코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우리의 동지여/ 마침내 그 날/ 우리 모두 해방춤을 추게 될 그 날/ 척박한 이 땅 마른 줄기에서 피어나는/ 눈물뿐인 이 나라의 꽃이 되어라.”(추모시 중에서)

박종철의 학과 선배인 장지희는 눈물로 새긴 추모시를 직접 낭독했다. 장지희의 낭송시는 혹한의 날선 바람이 울부짖는 교정의 겨울 하늘로 흩어져 날아갔다. 그들은 학우의 영정을 가슴에 품고 교문 밖으로 진출했으나 이내 좌절당했다. ‘고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마주잡은 플래카드가 찢긴 채 펄럭였다.

민주화운동 세력은 총집결해 2월7일과 3월3일 각각 대규모 집회를 열기로 계획하고 국민적 공분을 조직할 기회를 노렸다.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준비한 집회였지만, 2·7국민추도대회와 3·3평화대행진은 이전 집회에 비해서는 그나마 대중들이 부쩍 더 관심을 보인 행사였다. 그러나 국가 권력이 젊은이를 야만적인 고문으로 살해한 만행의 수준에 비춰보면, 두 집회의 위력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집회 현장을 힐끔거리며 주시하는 국민들은 아직 공포에 질린 얼굴이었다.

4월초, 민통련의 한 간부는 평소 친분이 있는 미 대사관의 재야담당 참사관 스티븐스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는다. 스티븐스는 그에게 2·7과 3·3 두 집회가 오히려 전두환에게 자신감을 심어준 결과가 됐다고 말했다. 국민의 저항을 물리력으로 완전 제압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으니, 전두환은 아마도 양보보다는 더욱 강공책으로 나갈 것 같다면서 몸조심하라는 충고도 곁들였다.

이 예상은 적중했다. 4월13일, 마침내 전두환은 일체의 개헌 논의를 금지하고 ‘체육관 선거’로 권력을 세습하겠다는 취지의 4·13 호헌조치를 내놓기에 이른다. 물을 끼얹은 듯한 적막 속에 한국노총·자유총연맹·전경련·문인협회 등 관변단체들이 이 ‘구국의 결단’을 환영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역전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간 직접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았던 교수·신부·목사·교사·법조인·의료인·연극인·농민 등 각계 각층이 전두환의 호헌 선언을 격렬히 비난하면서 성명을 쏟아냈다.

4·19기념일 아침, 매년 하던 대로 안병무·박영숙 부부의 수유리 집에는 묘소 참배를 마친 많은 재야인사들이 모여 늦은 식사를 하면서 4·13 호헌 선언에 따른 대책을 논의했다. 이날 의논 결과에 따라 4월22일 기독교회관에서 함석헌·송건호·박형규·계훈제 등 원로인사 28명은 ‘폭력호헌 저지 민주개헌 관철을 위한 국민운동’을 제안하면서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원로들이 농성을 시작한 기독교회관에서는 박종철의 영정이 그들을 지켜보았다. 어린 사슴처럼 순한 눈매에 가느다란 검은 뿔테 안경을 쓴, 명석해 보이는 22살의 청년. 원로들이 장기 농성에 돌입한 즈음 30, 40대 실무자들은 광범위한 범국민적 연대기구의 결성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아리따운 청년 박종철이 역사를 바꾸어 놓는 거룩한 대장정을 예비하고 있음을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교도관에 들은 사건진실···옥중 이부영 휴지에 메모-

고문 경관 2명이 구속됨으로써 마무리된 것처럼 보였던 박종철 사건은 넉달 뒤 더 큰 회오리를 몰고 왔다. 87년 5월18일 명동성당. 광주항쟁 7주년을 맞아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미사가 열리고 있었다. 미사가 끝날 즈음,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 김승훈이 단상에서 한 장의 성명서를 낭독했다. 제목은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은 조작되었다’였다.

성명서의 내용은 가감 없는 사실이었다. 태풍이었다. 국민들은 넉달 전 박종철 고문치사 당시보다 더욱 경악하고 분노했다. 경찰이 고문살해 범죄를 저지르고도 반성은커녕 어떻게든 파장을 약화시켜 보려고 고문 범죄의 진상을 조작하고 은폐하려 한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검찰은 사제단이 밝힌 고문 가담자 황정웅·반금곤·이정호를 서둘러 구속했다. 뿐만 아니라 은폐조작 모의를 주도한 박처원 치안감 등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간부들을 연이어 구속했다.

어떻게 죽은 박종철은 말이 없는데, 고문수사 밀실에서 일어난 일을 사제단은 그와 같이 소상히 알게 됐을까? 후일 밝혀진 경과는 이러하다.

먼저 구속된 두 경관은 구치소에서 날마다 울었다. 뭔가 이상했다. 마침 두 경관의 옆방에는 인천사태 배후조종 혐의로 민통련 사무처장 이부영이 수감돼 있었다. 그에게 매우 ‘협조적인’ 교도관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날마다 상황을 전달해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경찰 고위급들이 날마다 찾아왔다. 회유하기 위한 면회였다. 이부영은 마침내 고위층의 치밀한 각본에 의해 사건이 은폐 조작됐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 내용을 화장지에 깨알 같은 글씨로 써 교도관을 통해 밖으로 내보냈다. 이 쪽지는 숱한 우여곡절 끝에 사제단의 손에 들어간다.

사진은 dcinside 에서, 글은 다음뉴스에서 퍼왔음

어제가 박종철 열사의 기일이었다고 한다. 18주년이라고 들은거 같은데..

87년의 난 국민학생이어서 자세한 내용은 기억하지 못한다. 나중에 대학에 들어갈 때 즈음에 읽었던 '다시읽는 한국현대사' 라는 책을 통해서 자세한 얘기를 알 수 있었다. 책상을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더라 라는 내용과 함께 민주화 운동을 촉발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라는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 목소리를 낮추시면서 담임 선생님이 해주시던, 그때 당시엔 이해할 수 없었던 시국 얘기들과 함께...

간혹 술자리에서 박사님들 세대를 이야기하면서 민주화 운동에 관한 언급들을 하시는것을 듣는다. 거의 10여년 정도 차이가 나는데 내가 겪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얘기를 하시는걸 들으면서 많이 바뀌었나 부다 라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들어가서 해본 데모라곤 5.18 특별법 제정에 대한 데모가 전부다. 그 이후로는 해본 기억이 없다. 학생들의 사고가 바뀌어서 학생운동보다는 학교의 복지나 생활로 관심이 쏠려서 그럴꺼다 라고 생각한다.

다음 뉴스에 답글이 달린걸 보니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도 많은 것 같아서 안타깝다. 시간이 가면서 잊어가는건 자연스러운 거라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지 말아야 할텐데.. 조금은 안타깝다.

by BSang 2012. 3. 10. 16: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