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AU 멤버가 되었다는 메일이 며칠 전 왔다.

작년즈음에 멤버 가입이 된다는 메일을 받고서 신청했었었는데, 잊어버리고 있었다.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사람들이 모여서 의결을 하거나 그런것들도 어려운거 같아서 언제 되는지, 자격은 되긴 하는지 조금 의문스럽긴 했는데, 메일이 날아옴..

사실 전 세계에 천문학을 전공한 사람의 수가 궁금해서 가입한 것도 있었다. 찾아봐도 그런 질문에대한 명확한 답변은 없었으니까..

 

현재까지 IAU에 가입된 사람의 수를 보니,

국가의 수로는 82개국,

개별 멤버는 13398명,

주니어 멤버로는 736명,

명예 멤버로는 9명 이라고 한다.

대략적으로 14000명이 조금 넘는 사람들이 IAU에 가입을 하고 있다는 얘기..

우리나라 사람들은 몇 명인지 확인해보니 186명이라고 나온다.

대충 보니 정년퇴임하신 분들도 명단에 들어있는 것 같고, 

물론 가입을 하지 않은 사람들도 많기는 하겠지만 대략적으로 추정하는데 있어서 기준점이 되지 않을까..

뭐를 할 수 있는건지는 모르겠지만 뭐든 찾아봐야할듯..

 

 

 

 

by BSang 2020. 6. 14. 21:48

설 연휴가 지나면서 정말로 새해가 시작이 됐다.

설날 새벽 예불에 참석하면서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했으나, 여전이 떠오르는 여러가지 잡 생각들..

그 잡 생각들 중 대부분이 현재 직장에서 내가 했던 일에 대한 여파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걱정,

앞으로 맡아서 진행해야 할 일에 대한 걱정 등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만큼 직장의 일에 빠져서 살고 있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너무 거기에 몰입해서 살고 있구나 라는 생각..

그리고, 그 생각들을 버려두지 못하고 새벽예불을 드리는 시간에도 가지고 와서 걱정하는 모습도 그렇고,

직장에서는 집의 일을, 집에서는 직장의 일을 생각하느라 그때그때 처한 그 현실에 충실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다. 

집에서는 일한다는 핑계로 가족과의 관계에 집중하지 못하고있고, 앞으로 오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 등을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란..

말로는 우주적인 스케일로 보면 지구상의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으면서, 나 자신은 그 현실에 몰입되어서 헤매고 있는 모습이라니..

 

지난 2년간 내가 맡아서 했던 일이 그런 특성의 일이었기 때문에 그랬을수도 있었겠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으려고 한다.

물론 그 상황속에 들어가서 몰입하고 집중해서 해야 할 부분들도 있겠지만 조금은 그 상황에서 벗어나서 약간은 방관자적인 시선으로 바라봐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봤다.

그러려면 우선은 내가 나를 믿어야 되겠지..

 

조금씩이라도 짬을 내서 마음공부를 해보고 싶다.

by BSang 2020. 1. 27. 23:29

새해가 밝았고, 집에서 쉬다가 조금 전 컴퓨터 앞에 앉았다.

2020년이 되었다는데, 여전히 그냥 주중의 하루 쉬는 날이고 내일 출근하는 날이라는 걸로 느껴지는 날..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이제는 40대 중반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나이..

올해는 요 몇 년 동안보다 좀 더 글을 쓰고, 이런저런 일들을 해 볼 수 있을까?

by BSang 2020. 1. 1. 23:39

그와 나 사이를 가로지르는 강물은 여전히 흐르고 있다

하지만 그 위론 화해의 비가 내렸고 심지어는, 가끔은 꽃구름이 흘러다닐때도 있다

우리 두 사람은 강의 이편과 저편에 서서 가끔씩 손을 흔들기도 하지만

그저 바라볼 때가 사실은 대부분이다

 

그의 잔소리가 언제서부터인지 모르게 살갑게 느껴지는 것은

나의 삶이 타들어가는 번뇌의 시기를 지나왔기 때문인지

혹은 그의 삶이 휴식과 완성의 시기를 원하기 때문인지

분명한 것은 천진한 웃음을 띈 그의 얼굴은 아들의 어릴 적 얼굴을 닮아가고

정작 아들의 거울에 비친 얼굴은 아버지와 닮아있다

 

난들 왜 그가 기뻐할 번듯한 세속의 성공과 안정을 주고 싶지 않았겠는가만은

아무래도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은

멀지 않은 미래에 안겨줄 그의 얼굴과 나의 얼굴을 모두 가지고 태어날 그의 손주뿐인 듯 하다

 

그리고 그 아이는 내가 그에게 미처 표현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언어들을 순간의 울음소리로 알리리라

그렇게도 나는 나일뿐이고 싶어 했으나 이제는 또 다른 그가 되어 주고 싶다

나는 이 세상에 그가 남긴 흔적 혹은 남기고 갈 증거이다

나는 그의 육신을 나누어 받은 자

 

아이는 열리지 않는 그의 방문 앞에 오래도록 서있었다

칭찬에 굶주리고 대화에 목이 마른 아이였다

기다림이 원망으로 바뀌자 아이는 망치를 들어 문에 못질을 해버리고 그곳을 떠났다

 

세상의 머나먼 끝에서 고독의 눈물이 흐르던 날

아이는 그가 스스로 방문을 열어준 적은 없었으나

문을 잠근 적 역시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가 오래 전 박아 넣은 날카로운 못들을 하나씩 빼내자 문짝에선 피가 흘렀고

문을 떠밀자 그 문은 힘없이 열렸으며 그 문의 저편엔 주름과 세월이 가득 차있었다

그리하여 수줍은 아버지와 겸연쩍은 아들은 난생 처음 뺨을 맞대게 되었다

 

언젠가 그들의 이야기는 먼지가 되리라 세상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이

언젠가 이노래는 잊혀지리라 세상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이

 

그러나 아들은 아비를 기억하고 또 아들의 아들이 그 아비를 기억하며

그들의 피는 이야기나 노래 보다는 조금 더 오래 흐르리라

그리하여 우리 세상에 잠시 있었던 것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야기하리라

 

다른 시간, 다른 곳에서, 다시 만나..

by BSang 2019. 10. 27. 00:40

최근에 모 음악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쿠라키 마이의 20주년 앨범이 나왔다는 뉴스를 접했다.

한참전에 듣다가 말았던 음반들이 생각났고, 다시 들어보는 중이다.

앨범을 더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현재 찾은건 사진에 있는 저 정도..

 

저 앨범들 중에 가장 먼저 소장하게 된 앨범이 Wish You The Best 앨범인 것으로 기억한다.

일본에 가는 후배에게 부탁해서 구매해달라고 했던 앨범..

우타다 히카루를 알게 되어 들으면서 알게 됐지만,

우타다 히카루보다는 쿠라키 마이의 음악이 더 맘에 들어서 더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한참 듣다가 어느순간부터 듣지 않게 되었든데, 언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어느순간부터 나오는 노래들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었다.

 

어쨌든 나는 듣지 않고 모르고 있었지만, 이 가수는 꾸준하게 활동한다는 것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한 분야에 대해서 이렇게 꾸준하게 활동하는 것 자체가 대단한듯..

by BSang 2019. 10. 7. 00:44

최근에 카톡 프로필을 보면서 P 박사님의 프로필이 바뀐 모습을 봤다.

누군가와 함께 웃으며 같이 찍은 사진..

아마도 연구원에 있는 분들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겠지만 나는 카톡 프로필을 통해서 그냥 짐작만 하는 정도..

 

박사님을 처음 알게 된 건 2003년인 것으로 기억된다.

연구원에 계시던 다른 박사님께서 와서 일해보지 않겠냐고 해서 연구원을 나가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인사를 드리고, 뵙게 되었다. 

미국으로 관측을 가게 될 때 박사님의 가족들도 연구년 형태로 같이 나와서 숙소에서 같이 생활하기도 했었고,

대학원 박사과정에 박사님과 둘이서 관측하러 들어갔다가 모든 나쁜 일들을 같이 겪기도 했었다. 짐 분실에 전화불통, 나중에는 프리웨이에서 교통사고까지..

이 곳으로 오게 되었을 때 메일을 드렸었는데, 새 출발을 축하한다고 격려해 주시기도 하셨고..

지금은 일선에서는 물러나셨지만 여전히 그 그룹에서는 큰 어른이신 분..

 

박사님 개인적으로 안좋은 일들을 계속 겪으시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안타까웠었다.

박사님의 카스에 적은 글 같은 곳에서 절절한 심경이 느껴지기도 했었다. 

작년이었던가..어느 방송을 보다가 방청객으로 앉아계신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었다..

아무튼..오랫동안 혼자 생활하시다가 (아마도) 좋은 분이 나타나신듯..

힘드셨던 기억을 극복하고 평안하셨으면..

by BSang 2019. 6. 2. 22:59

지난 월요일에 홍승수 교수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식을 듣고서 빈소에 올라갈 사람을 정하고, 차편을 이용하여 다녀왔었다.

올라가는 중에 차에 문제가 생겨서 고치고 빈소에 도착하니 자정이 넘은 12시 반 경...상주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거기서 앉아있다가 다른곳에서 온 분들을 보고 새벽 두 시 경에 내려왔고, 집에 도착하니 아침 5시 30분..

정신없이 다녀왔었다.

 

같은 부서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다 다녀온 듯 싶다. 다른 원에서는 누가 왔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교수님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으니까 그랬을 것 같다.

여기에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었고, 또 강의를 하시던 모습을 찍어놓은 영상물을 보기도 했구..

이곳에서는 교수님 이라는 명칭보다는 원장님 이라는 명칭이 더 익숙한듯..

 

나와 교수님 간에는 특별히 마주치거나 할 일이 거의 없었다.

내가 처음으로 기억하는 건, 윤홍식 교수님과 이상각 교수님의 정년퇴임식에서 말씀을 하실 때 목소리가 상당히 좋으신 분이라는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천문연에 오셔서 계시는 걸 봤던 기억..

그리고 이곳으로 입사하게 될 때 면접관으로 오셔서 질문하셨던 것과,

아시아태평양 천문올림피아드 준비와 관련하여 회의를 할 때 뵈었고, 잠시 얘길 한 것이 전부..

그리고 출판사에서 교수님의 자료를 모으는 것을 챙겨달라고 하셔서

긁어모아서 출판사로 보내면서 한두 번 메일을 주고 받은 것이 전부..

 

다만 내가 아는 건, 이곳에 와서 남아있는 글들을 통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셨는지에 관한 내용들과,

천문학계에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만한 거목이시라는 것..

학과 초기에 살인적인 강의를 하면서 사람들을 키워냈다는 것은 다른 교수님의 회고록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아직도 교수님이 번역하신 책들을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는데...이제는 영영 뵐 수가 없게 되었다.

대학원을 다닐 때 돌아가셨던 김정흠, 조경철 박사님 이후로 학계에서는 커다란 거목을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듯..

 

가끔 이곳을 좀 더 일찍 내려왔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랬으면 교수님과 어떤식으로든 부딪히면서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아픔없는 곳에서 평안히 영면하셨으면..

by BSang 2019. 4. 22. 23:00

대원사를 들어가기 전에 보이던 곳..

대원사를 둘러보고 나와서 박물관 안을 구경..

 

티벳박물관

안에 들어가서 티벳과 관련된 내용들과 경전, 물건, 달라이라마 등에 대한 내용들이 전시되어있었다.

지하 1층으로 내려가니 웹툰 신과함께 와 연관을 지으려고 한 것인지, 저승세계에 대한 구경을 할 수 있도록 되어있음..

 

저승세계를 구경하기 위한 입문

들어가서 바로 볼 수 있는 건 저승시왕에 관한 탱화들..

탱화사이에 걸려있던 보물지정서..

 

구경 후 2층으로 올라가서 전시되어 있는 것들을 구경..

티벳의 만다라 등이 전시되어 있었고, 부처님과 사리가 놓여져 있었음..

가섭불 이라고 해서, 부처님의 제자 마하가섭을 얘기하는줄 알았으나,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석가모니 부처님 바로 전의 부처님이시라고..

그 부처님의 진신사리라고 모셔두었던데, 정말인지는 모르겠음..

2층 구경 후 1층으로 나와서 빠져나왔다..

 

생각보다 전시해 놓은 것이 그리 볼만한 것이 없어서 그리 볼만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지하 1층 저승세계를 둘러보면서, 티벳의 천장에 대한 설명과 사진이 걸려있었고 그게 가장 인상적이었다.

얼마 전 본 어떤 다큐에서 천장의 장면이 잠시 나왔었는데(물론 방송이라 자세히 보여주진 않았지만)

이곳에서는 그 사진들을 걸어놓았는데...나로서는 충격이었다..

생노병사 중에서 사에 관해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진이랄까..어찌보면 혐오사진일수도 있고..

오랫동안 머리속에 남았다.

 

나중에 다시 들를만한 곳인지는...글쎄..

by BSang 2019. 4. 19. 01:41

얼마전 인터넷으로 티벳 사찰이 보성에 있다는 글을 보고 찾아간 곳..

찾아가다보니, 대원사로 들어가는 벚꽃길이 아주 유명한 길인듯..

거의 5킬로 정도 되는데, 이쁜길 10개 안에 뽑혔다고..

 

절 들어가는 앞쪽에 티벳박물관이 있었고, 그 오른쪽으로 해서 올라가는 곳..

 

화순 운주사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부처님..

 

건물에 써 있는 글씨가 낯이 익어서, 저건 추사 김정희의 글씨인데 라는 생각을 한 현판..

찾아보니 역시..

옆에 써 있는 이름을 사진을 찍을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완당 이라고 적혀있다. 

완당은 추사 김정희의 또 다른 호..

천량수각..원래 말은 무량수각

 

이 절에는 특이하게도 아도화상을 모신 곳과, 황희정승을 모신 곳이 있었다.

아도화상은 고구려에 불교를 전파한 인물인데, 이곳에서도 절을 세우셨다고..

황희정승은 이 곳으로 유배왔을 때 이 곳 스님과의 인연이 있었고, 그 자손이 절을 보호했었다고 적혀있음..

황희영각

이 절에서 또 한가지 특이한 것은 김지장 전이 있다는 것..

김지장 스님은 신라의 왕자였으며, 중국으로 건너가 지장보살로 추앙받던 스님..

중국으로 건너갈 때 삽살개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는 얘기도 있음..

 

전란으로 인해서 아미타전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실되었다가 나중에 복원했다고..

그래서 그런지 대웅전이 없고 아미타전이 절의 중심부에 있음..

화순 운주사도 그랬지만 뭔가 절이 배치가 체계적이지 않고 여러가지 것들이 경내에 흩어져 있는 느낌..

불사를 하고 있는 것 같던데, 절의 모습이 갖춰지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by BSang 2019. 4. 19. 01:18

보성에 있는 대원사를 들렀다가 찾아간 곳..

대원사 가는 길에 공원이 먼저 보였고, 돌아오면서 들른 곳..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독립신문을 발행한 사람이고, 독립문을 만든 사람이라는 것 정도만 머리속에 있어서

볼 만한 것이 있을까 하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방문..

결과적으로는 보고 생각할 만한 것이 상당히 많았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기념공원 앞에 서 있던 독립문..

예전에 퀴즈문제에서 이 문을 만들때 들어간 돈이 얼마나 되느냐 라는 문제가 있었는데 들어간 돈이 3000원이라고 했던 걸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문을 없애고 지은 문이며, 원래 지어진 위치에서 지금은 옮겨져 있다는 것도..

 

앞쪽으로 들어가서 오른쪽편에 있는 건물에 들어가니, 독립운동으로 훈장을 받은 사람들의 사진들이 걸려있고, 외국인으로서 훈장을 받은 5명의 사진도 걸려있었다. 그 중 가장 최근에 봤고, 익숙한 인물이 장개석과 그의 부인..

 

건물로 들어가서 구경 시작..

독립문을 모티브로 만든 입구..

기념관으로 들어가는 입구

 

입구에 들어가서 보이던 글..

 

대한제국 왕실에서 준 의자와 탁자인듯..

 

미국의 병원에 걸려 있던 의사 서재필의 안내판..

 

해방 후 미 군정의 권유로 들어온 서재필

 

 

 

 

 

 

맨 아래의 모형은 서재필이 가지고 있던 것이라고..

 

영한사전을 만들기 위한 초안인듯..

 

 

유일한과의 인연

 

의사로서의 생활

기념관 구경 후 찾아간 서재필의 생가..

기념관에서 1.4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곳..

설명에 의하면 태어난 곳이 외가라고..

 

서재필 생가의 모습

 

 

 

서재필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독립신문, 독립문, 교과서에 실린 위인 정도가 거의 전부였는데,

이 곳을 들리면서 많은 걸 알게 되었다.

전에 팟캐스트 방송을 들을 때, 서재필은 국내에 들어와서 우리말을 하지 않고 영어로만 대화를 했다는 얘기를 듣고 

이 사람은 친일파만큼은 아니겠지만 별로 좋은 사람은 아니다 라는 인식이 박혀있었다.

실제로 남겨진 기록물이나 그가 적은 글들이 모두 영어로 적혀있었고, 심지어 한국사람들과 편지를 쓸 때도 영어로 써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내가 몰랐던 것은

갑신정변을 일으킨 인물 중의 하나였다는 것과(사실 기억하는건 김옥균 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서 본인은 일본으로 갔다가 일본의 냉대로 미국으로 망명했으며,

한국에서는 역적으로 몰려 그의 가족들과 부인, 아이까지 죽었었다고..

그리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나이가 21세..

이 부분까지만 보고서도 그럴수 밖에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을 다 잃은 슬픔과 분노가 하늘을 찔렀을터이고,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환멸을 느낄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으니...

게다가 미국에서 미국인과 결혼을 했으니 집에서도 한국말을 쓸 기회가 없었을테고..

 

그 외에도 

갑오경장 무렵에 사면을 받아 국내에 들어와서 독립신문 창간 등의 역할을 하고

그 당시의 집권자들의 눈에 나서 다시 국내를 떠났지만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고

해방 후에 미 군정의 요청에 따라 국내에 들어와서 여러 활동을 하고 다시 미국으로 귀국해서 눈을 감았다는 내용 등은 내가 잘 모르는 내용이기도 했다.

해방 전후에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있었다고..

 

특히나 그가 의사였다는 것은 기념관을 가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교과서에서 단편적으로 배웠던 내용을 입체적으로 알아가는 기분이랄까..

그리고 왜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생각들을 하게 됐다.

사실 따지고보면 미국인이었지만, 그의 노력이 인정되어서 훈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이 날 방문했을 때 그의 초상이 모셔진 사당 안에 대통령의 화환이 놓여있었다.

 

나중에 다시 방문해서 다시한번 살펴보고 싶은 곳..

by BSang 2019. 4. 19. 0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