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의 글을 읽고 며칠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네. 내가 오랫동안

교수로서 해왔던 고민을 다시 한번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에 대해 아주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마찬가지로 처음으로

내가 하는 고민을 학생들에게 고백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아

다행스러운 면도 있는 것 같고.

돌이켜 보면, 벌써 "교수"를 직업으로 가진지가 벌써 15년이 다

되어가고 있군. 시립대에 온 지가 벌써 7년째이고, 시립대에 오기

전에 미국에서 교수를 한 것도 8년이고. 거기에 미국에서 강사를

한 2년을 더하면 거의 2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기도 하네. 미국에서는 주로 MBA나

학부 4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경영전략이나 국제경영학 과목을

가르쳤지. 대개 내 수업은 학생들이 졸업하는 학기에 경영학을

총정리하는 기회로 듣는 과목이었고.

처음에 한국에서 학생을 가르친 것이 95년이니까, 지금 03학번이

국민학생이었을 때인가? 미국Georgia State University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중앙대학교에 교환교수로 나왔을 때지. 물론 그 때는

일년동안 경영학원론 한 과목하고 대학원 한 과목만 하는 아주

부담없는 경험이었지만 말이야. 그 때 내가 했던 과목이 95학번

신입생을 대상으로 경영학원론 원강이라는 것이었는데, 영어로

진행하는 수업이었어. 벌써 8년전에 중앙대학교에서는 모든

수업을 영어로 진행하는 과목이 개설되어 있었다는 말이지.

잘 알겠지만 이미 많은 대학에서, 특히 경영학과에서는 전체 과목의

2-30%가 영강으로 진행되고 있다잖아?

그리고 나서 다시 미국에 돌아갔다가 시립대로 부임한 것이 97년이네.

97년에 처음 본격적으로 한국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을 때, 나는 당연히 미국에서 가르치던 방식과 수업양을 그대로

사용했지. 그런데 미국에서 쓰던 수업계획서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너무나 다른 현실에 직면하게 된 거야. 학생들이 도저히 따라오질

못하는 거지. 결국 미국에서 하던 양의 반이 아니라, 반의 반도 못하게

되더라고.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다네. 아 이 친구들이 과연 어쩌자고

이러고 있을까. 세상은 너무도 빨리 변하고 있고, 글로벌 시대가

(그 때 당시로 보면) 이미 코 앞에 닥쳐와 있는데 이렇게 준비해서

될까라는 걱정이 정말 많이 들더군.

그때부터 7년이 흐른 지금에야 겨우 미국에서 내가 하던 양을 거의

같은 수준으로 올릴 수 있었다네. 자네가 들은 그 수업 말이야.

얼마나 숙제가 많고, 준비할 게 많아 부담이 된다는 수업이라고들

불만이 많은가. 미국의 일반적인 대학생은 한 학기에 4-5과목을 듣는데,

거의 모든 수업이 내 수업정도의 강도를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네.

그런 수업을 4년 동안 들은 미국의 대학졸업생과 한국, 특히 우리

시립대의 학생들의 경쟁력을 비교해 본다면 아주 두려운 생각이

들지 않는가? 왜 미국의 대학이 세계 최고라고 평가받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게. 97년만해도 미국의 대학생은 미국에서, 한국의 대학생은

한국에서 경쟁한다는 생각도 할 수 있었겠지만, IT의 발달은 이미

그런 생각을 과거의 유물같이 만들어 버렸다네.

기업이 가지고 있는 여러 조직이나 기능을 한국이나 미국이나

홍콩이나 싱가폴 같은 특정?? 지역에 꼭 유지해야 할 이유가 없어져

버린 것이지. 예를 들어, 한국지사의 인사기능을 이제는 꼭 한국에

둘 필요가 없어져 버렸다는 거야. 한국, 일본, 호주, 홍콩, 싱가폴 등

모든 아시아 지역 지사의 인사기능을 한 곳에 집중함으로써 효율성을

향상할 수 있게 된다면, 어디로 집중해야 할까? 한국? 호주?

그 의사결정을 내리는 핵심결정요인은 바로 호주나 일본, 호주,

홍콩 등의 인사담당자와 비교한 한국 인사담당자의 경쟁력이라는

것이지. 경쟁이 글로벌화되고 있다라는 것은 제품시장의 경쟁만을

말하는 건 아니야. 앞으로 몇 년만 지나면 이런 사실은 너무도

명백해지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한국의 대학생은 결국 미국이나

홍콩이나 싱가폴의 대학생과 경쟁할 수 밖에 없게 되어 버리겠지

(물론 이미 그렇게 되어 버렸지만, 아직은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만).

이제는 개인이 국가를 선택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버렸다네. 얼마

전에 무라까미 류의 소설을 읽다가 충격을 받았지. 그 사람이 “일본은

필연적으로 망할 것이다. 일본이 ?÷? 필요로 하는 것은 글로벌화되어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춘 인재인데, 이런 인재들은 지금 일본을 떠나고

있다”라는 글을 썼더군. 이 문장에서 “일본”이라는 단어를 “한국”으로

바꾸면,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지.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춘

인재들은 이제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에 사는 것이

아니야. 그 사람들은 한국에서 사는 것이 지금 가장 유리하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것일 뿐이지. 다른 좋은 기회가 생기면 언제든지 떠날

수도 있고. 바로 그런 이유로 그런 인재들이 한국에 있는 것을

유리하다고 생각하게끔 유도하는 정부정책이 나와야 하는 것이고,

한국이라는 국가의 국가경쟁력에 대해 연구기관들이 고민하고 있는

것이지. 지금 학생들은 이렇게 무서울 정도로 바뀌는 환경에서

생존해나갈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춰야만 하는 거야.

미국에서 학생을 가르칠 때는 상당히 인기가 있는 교수였고,

수업평가를 하면 2-30명의 학생으로부터 5점 만점에 5점을(그러니까 모든 학생이 모든 평가항목에서 5점을 주었다는 거지) 받는 경우도 종종

있었던 내가 왜 시립대에서는 자네 말처럼 “경영학부 학우들에게

인심을 잃은” “모든 학생들이 비추라고 말하는” 그런 교수가 되었을까?

물론 한국과 미국 사이의 문화적인 문제도 있을 수 있겠고, 내

개인적인 스타일의 문제도 있을 수 있겠지. 나처럼 소리치고 야단치고

“갈구는” 교수님들은 별로 안 계실 테니까 말이야.

수업시간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다만, 나는 아주 초조하다네. 교수로서

나의 고객은 “사회”이고 “기업”이다라는 말은 한 적이 있지? 나의

임무는, 그리고 나의 “존재의 이유(Raison d’tre)”는 나의 “제품”인

우리학교 학생들을 나의 고객인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로 양성해서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네. 그런데 우리 학생들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로 빨리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은 나를

아주 괴롭게 만들고 있지.

사회가 원하는 인재, 혹은 기업이 원하는 인재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청년실업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구직자는 직장을

찾아 헤메고 있는 동안, 기업에서는 사람이 없어서 사람을 찾아

헤메고 있다는 이야기는 언론을 통해서 잘 알고 있지?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아직도 우리 학생들이 이런 환경변화를 제대로 못 느끼고

있는 것 같아.

얼마 전에 우리 학교 취업비율이 어떻게 집계되고 있는지를 알고 너무

놀랐다네. 아무도 정확히 집계할 수 없기 때문에, 작년보다 약간

높은 수치로 그냥 보고한다는 거야. 우리 학교 학생들의 많은

수가 사회에서 인정받을 만큼 충분한 경쟁우위를 갖추지 못한 채

졸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고, 신입생들은 그런 선배들의 모습은 정확히

보지 못한 채, 선배들을 당연한 모델로 여기고 그 모습을 따라가고

있는 것 같다는 게 내 느낌이지.

우리 학교 졸업반 학생들하고 이야기하면 너무도 답답한 게 많다네.

세월이 가고 세상이 바뀌었다면 뭔가 달라질 법도 한데, 많은 학생들이

여전히 「어제의 방식」대로, 「우리의 방식」대로 살기를 고집하고

있다는 느낌이야. TOEIC 몇점이 필요하고, 학점은 어떻고 라는 식의

과거의 모델에 집착하고 있는 거지. 그게 안되면 “눈높이를 낮춰서

중소기업으로” 아니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자격증으로”라는

식으로 말이야.

기업이 원하는 인재는 단순한 TOEIC점수가 아닌 진짜 영어실력이고,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밝히고 남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력이고

발표력이고, 경력사원 정도로 준비가 되어 있는 신입사원이지. 결국

남이 지시하는 업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피동형 인간이 아니라,

스스로 새로운 문제를 파악하고 그 해결책을 능동적으로 찾아내고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재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지. 그러니까 현대자동차에 내는 원서와 면접요령하고

삼성전자에 내는 원서와 면접요령은 전혀 다를 수 밖에 없는 거야.

4학년 때 똑 같은 원서에 똑 같은 자기소개서를 여기저기 내고

“성실히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방식으로는 절대로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없는 세상이 이미 되어 버렸다네. 그러니까 이미 3학년때면

영어나 논리력 같은 기초는 튼튼히 갖추고 자신이 원하는 경력에

특화되는 방향으로 준비를 해야 한다는 거야.

이런 것을 국제경영?隙犬? 경영전략이나 경영사례연구 같은 과목을

듣는 3-4학년 학생들에게 말해주면서 느낀 점이 무엇인 것 같은가?

미치도록 답답하지만 “이미 늦었구나”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네.

내가 경영학원론을 맡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야.

1학년 때부터 내가 가르치는 방식으로 공부를 한다면 3-4학년이 되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가지고 말이지. 물론 몇 년전에도

한번 시도했다가 학생들을 끌고 가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포기를 한

적도 있다네. 그렇지만 이번에는 다른 교수님들도 많이 도와주시고

동감해주시기 때문에 계속해 볼 생각이긴 하지.

내가 강조하는 것이 몇가지가 있지? 바로 그것 때문에 숙제가 많다라는

생각들을 하는 것 같지만 말이야. 먼저 글로벌화된 인재를 양성한다는

의미에서 원서 교과서와 Critique를 요구하는 것이야. 우리 시립대

학생들이 일반적으로 가장 큰 약점으로 가지고 있는 점이 바로

영어거든. 미국이나 홍콩, 싱가폴, 호주를 제외하고라도 서울의 많은

대학의 학생들이 이미 2-30%의 과목을 영어로 듣고 있는데, 우리 학교

학생들은 아직도 영어에 대해 막연히 “해야지”라는 생각만 하고

있다가 나중에는 겨우 TOEIC이나 하자라는 식이 되어버리잖아?

TOEIC이란 이제는 그야말로 최소한의 요구조건이지,

TOEIC점수가 높다는 것만으로 기업이 “아 영어 잘하는구나”라고 인정해주는 시대는 이미 지나가 버렸는데 말이야.

이런 말을 하면 우리 학교 학생들은 “최소한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니냐”

라는 생각을 하지? 그런데 이제는 “최소한”이란 아무 의미가 없지.

워낙에 많은 경쟁자들이 있으니까, 분명한 경쟁우위가 있어야 한다는

거야. 기업 인사담당자들 역시 시립대학생은 영어를 못할 것이다라는

인식을 하고 있을 거야. 그런데 “아 이 친구는 TOEIC이 무척 높네? 아

영어를 잘 하겠군”이라고 호의적으로 보기 보다는 “아 이 친구는 역시 TOEIC점수만 높지, 영어는 잘 못하는 군”이라는 식으로 생각할 확

률이 높아 보인다네.

자 그렇다면 영어는 어떻게 공부해야 할까? TOEIC은 한 1년 정도

집중해서 투자하면 결과가 나올 수 있지만, 영어실력은 1-2년 가지고

대폭 늘지는 않는 것 같은데 말이야. 내 경험에 의하면 영어회화에서

“I am, you are, he is”같은 “Be” 동사를 제대로 활용하는데 까지만 1년이

꼬박 걸렸다네(물론 1년 동안 매일 두시간 이상 영어에 투자했는데도

말이야). 1학년 때부터 시작해서 꾸준히 해야 졸업할 때 그래도

어느 정도 영어실력을 갖출 수 있게 된다는 것이지. 자 이제 영어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하는 세상에서 영어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정답은 “무식하게, 꾸준히, 일찍부터”라는 거지. 다른 학교

학생들은 2-30%씩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말이야.

물론 어렵지.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네. 하지만 세상은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네. “나는 원래 영어를 잘 못해요,” “지금까지 발표식

수업을 받은 적이 없어서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려요,” “나는 집이 좀

여유가 없어서 많은 경험을 하지 못했어요”라는 이야기를 하면, 사회는

“그러냐. 참 안됐구나”라고 위로를 해 줄지는 몰라도 그런 부분을

감안해서 가산점을 주지는 않는다네. 불??한 위치에 있는 만큼 더욱

노력해야 할 뿐이지. 세상은 절대로 공평하지 않다네.


자 그렇다면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요구해야 할까?

어차피 4년이라는 시간은 어느 학교 학생에게나 똑같이 주어져있는데,

그 4년을 어떻게 보내도록 유도해야 할까? 갓난 아이처럼 애지중지

보살펴서 키우는 것이 참 좋아보이기는 한데, 그렇게 해주면 4년 안에

이 험난한 세상을 혼자 힘으로 헤쳐나갈 수 있는 역량을 갖추기

힘들어 보이는데 말이야.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기 호랑이

방식이 지금 우리 상황에서는 옳은 것 같다네. 살아 남는 일부는

틀림없이 4년 후에는 상당한 역량을 갖출 만큼 준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지. 안타깝게도 포기하고 벼랑에서 떨어져버리는

아기 호랑이가 너무 많은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야.

Essay나 Book Report같은 숙제가 기대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학생들의

표현력과 논리력의 향상이지. 지난 몇 년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전통적으로 글을 통한 Communication보다는 얼굴을 맞대는

말을 통한 Communication을 선호해왔지만)에서도 Written Communication이

빠른 속도로 강조되어 가고 있지. E-Mail의 영향도 크지만, 이제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협의를 진행하지 못하고 점차 개인의 책임이

강조되어가면서, “근거”나 “증거”로 남길 수 있는 글을 선호하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한국의 기업에서도 이제는

“Powerpoint”나 “Word”같은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글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야 하는 상황이 정말 놀라울 정도로 대폭 늘어났다네.

그렇다면 글을 통해 남에게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밝히고, 남을

설득할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하는 것은 필수적인 조건이라네. 여기서

중요한 건 표현력과 논리력이지. 어떤 사항이 왜 문제이고(많은

경우에 문제로 지적되면 그 문제를 만들거나 간과한 사람이나

조직은 무척이나 싫어하기 때문에 그게 문제인지를 납득시키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경우도 많아), 그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향은 무엇이고,

왜 그 방향이 옳은 것인지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하는 거야.

이것이 바로 “창의력”의 문제잖아? 새로운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창의력”을 갖추는 것 역시 무척이나 사회에서

요구하는 역량이지. 이런 창의력을 키우는 것은 “경험”과

“논리력”이야. 많은 문제를 스스로 생각해서 풀어보는 “경험”을

해보고 이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해 보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의 해결책에 대해 누군가가 비판을 해 주는 것; 이런 능력을

학원에서 혹은 교과서로 주입식으로 배울 수는 없거든.

그야말로 1:1 방식으로 “도제”와 같은 방법으로 전수될 수 밖에

없다는 거야. 마치 자전거타는 법을 배우는 것처럼.

논리력이란 어떤 사안을 “당위”가 아닌 “근거”를 가지고 설명하는

것에서 출발하지. 수업시간에도 많이 지적이 되었지만, “나는 이렇게

본다”라거나 “내 생각은 이렇다”라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는 있지만 절대로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는 없지?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역량은 어떻게 갖출 수 있을까? 정답은

“무수한 실패와 실수를 반복하면서도 끊임없이 해 보는 것”이지.

내 생각에는 이미 많?? 학생들이 학기 초와 학기 말의 자신의

글쓰는 역량을 비교해보아도 자신의 실력이 늘었구나라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을 것 같네. 물론 많은 학생들은 이제 수업이

끝났으니 다시 귀찮게 무엇인가를 쓸 것으로는 생각되지는 않지만,

사고의 기본축이 보다 논리적으로 변화하는 계기는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결국 수업의 요구사항들이 다른 수업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많은

것으로 보여질 수 있다라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네. 하지만 숙제의

양을 미국의 대학생과 비교한다면 절대로 많지 않다라고 단언할

수 있다네. 그리고 이 정도를 해내야지 향후 자신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라는 것이 내 소신이기도 하고.

가끔 이런 말을 하는 학생들이 있지. 세상에 영어도 잘하고

글로벌화도 잘 되어 있고, 창의력도 갖추고, 표현력도 좋고,

논리력도 분명하고, 자신의 진로에 대해 분명한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정답은 “매우 적다”라는 거지.

바로 그래서 세상이 “부익부, 빈익빈”으로 바뀌고 있거??. 불과

1-2년 전에 20:80의 법칙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었지? 세상에 20%만이

무엇인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일을 하고, 80%의 사람들은

사회보장의 혜택을 보면서 살게 될 것이다라는 예상 말이야. 물론

100년쯤 후에는 물질적인 부가 확대되어 사회보장의 혜택을 보면서

놀고 먹는 것 자체가 대단히 좋은 수준까지 올라가서

공상과학소설에 나오는 것 같은 사회로 발전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내 느낌으로는 이미 20:80의 시대는 지나고, 10:90정도로 바뀐 것 같지만,

얼마 전에는 더욱 충격적인 글을 읽었다네. 일본의 어떤 사람이 이미

일본은 5:95로 진행하였고, 곧 1:99로 변화될 것이라는 말을 했더군. 내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지금부터 20년 이내에, 그러니까 03학번 학생들이

40대가 되기 전에 한국도 1:99의 사회로 진행된다는 것이지. 나는

그 때 우리 시립대 학생들이 될 수 있으면 많이 1%의 그룹에

속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네.

자 학생들이 내게 가지고 있는 두번째 중요한 불만은 “인격적”인

부분이지? 예를 들어, “시립대는 똥통이다”라는 말에서 드러나는 것

말이야. 내가 그 말을 하는 것 자체는 잘못일 수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하네. 하지만 과연 내가 그 말을 왜 할까? 내가 그 말을 통해서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

먼저 내가 우리 시립대 학생들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그런 말을

하지도 않겠지. 수업시간에 떠들고 소리치고 야단치는 일은 무척

피곤한 일이거든. 그냥 앉아서 발표나 시키고 듣고 있거나, 아니면

칠판 앞에서 학생들이 따라오던 말던 나홀로 진행하면 아주 편하게

살 수도 있잖아?

나는 시립대와 시립대 학생들이 너무 안타까와 보인다네.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중요하지만, 진정한 자부심도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

자신의 치부를 건드리면 깜짝깜짝 놀라면서 신경질적인 대응을 하는

경우가 혹시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느낌을 받지. 우리 시립대의

특성을 몇가지 들어보면 먼저 정말 지나치게 “내부지향적”이라는 게

눈에 띈다네. 전농동 밖의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얼마나

무서운 속도로 바뀌고 있는지 전혀 무시하고 예전의 시립대 방?컥?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도 두렵다네. 물론 그래도

변하고 있지 않느냐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지. 그런데 말이야,

우리가 변화하는 속도가 세상이 바뀌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우리가 변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잖아?

하나의 예를 들어본다면, 지난 학기에 Book Report용으로 제시한 책

중에 “IT와 E-Business”에 관한 책들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아무도

그 책에 대한 글을 쓴 사람은 없었다네. 신문이나 TV에서 수도 없이

나오는 이야기가 향후 IT관련 인력부족현상이 어떻고, IT와

E-Business로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등인데도 말이지. 아주

두려웠다네.

우리 시립대를 연세대나 고려대 같은 학교와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분명히 나타나잖아? 내가 수업시간에도 자주 이야기하지만 “연대나

고대를 한 번 가봐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백양로를 걸어

올라가기만 해도 그 넘치는 플래카드를 통해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연대나 고대가 학교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이것은 결국 학생들의 경쟁력을 높인다는 것하고 똑 같은

이야기지),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지 과연 우리 학생들은 알고

있을까?

자 학교에서 적극적인 지원을 해주는 연대나 고대의 학생들과 우리

시립대 학생들이 밖에 나가서 경쟁을 해야 한단 말이야. 어떻게 해야

하지? “우리 시립대도 연대나 고대만큼 지원하라!!!”라고 데모를

해야 하나? 나는 그건 비현실적인 방법이다라고 보는 거야. 학교가

그렇게 바뀌는 것은 요원하니, 그런 만큼 학생들이 더욱 더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는 거야.

내가 존경하는 인물 중에 아키라 쿠로사와라는 일본의 영화감독이

있다네. 그 사람이 50년대에 만든 작품 중에 “라쇼몽”이라는

흑백영화가 있지. 그 마지막 대사가 “인간은 너무도 약한 존재인 나머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라는 거야. 장애자가 세상의 눈을

회피하고 자신의 방안에만 숨어 있으면서, 자신의 장애를 스스로

감추면서 “이 정도면 괜찮아”라는 것 같다고 비교하면 좀 지나칠까?

세상에 대한 막연한 적개심을 느끼면서 말이야.

우리 학교는 똥통이라네. 학생들에게 충분한 지원을 못해주고 있고,

충분한 자극을 주지도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야. 그런데서 우리

학생들이 “똥통에서 용났네”를 축하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우리 학생들이 “스스로의 약점에 눈을 감아 버리는 장애자”같은

모습을 떨쳐버리고 “나를 믿자” “내가 해내자”라는 도전의식을 갖기를

바란다네. 그 정도로 강력한 자극이 필요할 정도로 문제가 심각해져

있다는 것이 내가 가진 위기의식이기도 하고.

이런 행동이 “인격적인 문제”로 비춰질 수도 있다라는 것을 인정한다네.

마치 “허접한 경제학과”라는 농담이 경제학부 학생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지금 다시 한번 고백하자면 나는 경제학은

경영학부 학생들이 필수적으로 들어야 하는 과목이라고 생각해. 최소한

경제학원론하고 미시경제학은 경영학부 학생들의 필수과목으로

만들어야 한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그래서 “허접한 경제학과”라는

농담에는 경제학부 학생들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고, (이해할 ??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그게 내 방식의 애정표현이라는

것은 밝혀두고 싶어. 마찬가지로 “시립대는 똥통이다”라는 말에 우리

시립대 학생들에 대한 애정과 기대가 담겨있는 내 나름대로의

애정표현방식이라는 것도 말이지.

교수로서 누구나 고민하는 것이지만, 모든 학생들을 만족시키커나

학생들에게 모두 효과적인 방법은 없는 것 같아. 어떤 사람은 도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나하고 싸우면서 커나가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수

있겠지.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래서 경영학원론도 여러

교수/강사가 나눠서 맡고 있는 것 아닐까?

기억나는 여학생이 하나 있어. 첫 발표때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도

발표를 마무리지었던 학생이지. 나중에 내 수업을 통해서 세상을

조금 배웠다라는 인사메일을 받았을 때, 정말 아주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네.

두서 없이 변명을 늘어놓은 것 같아 좀 어색하기도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던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기회였던 것 같구나. 아무쪼록 우리

시립대 학생들이 역량을 갖춰서, 사회에서 훌륭하게 한 몫을 해 낼

수 있는 인재로 발전해 주기를 바라네. 그래야 우리 시립대가

“똥통에서 벗어난 용”으로 바뀔 수 있지 않겠어?

긴 글 읽어줘서 고맙네.

<출처-훌리건 천국..>

서울에 있는 시립대의 교수님이 쓰신 글 같다.

그치만 어떤 분야를 하든 위의 글과 비슷할거라고 생각이 된다.

글에서 교수님이 학생들의 장래를 생각하고, 아끼는 마음이 그대로 묻어나오는것 같다.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중요하지만, 진정한 자부심도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

자신의 치부를 건드리면 깜짝깜짝 놀라면서 신경질적인 대응을 하는

경우가 혹시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느낌을 받지."

특히 이 부분에서, 나 역시 작년에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반성을 하게된다.

이런 생각들을 조금이라도, 우리들에게 보여주신다면...

아무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의사소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다시....힘내자구..

by BSang 2012. 3. 1. 14:38




받아놓은지 1년이 넘게 지난 영화를 지금에서야 보다.

컴터 하드를 뒤지다가, 이거 볼까 해서 본건데....정말 괜찮은 영화이다.

포스터를 봤을 때 내가 모르는 배우인가 보다 했는데, 알고보니 잘 아는 배우였다.

"환생" 에서 초난강과 같이 나왔었고, "런치의 여왕" 에서 다부지고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던 배우일줄은..^^;;

환생 에서도 이 영화와 비슷한 설정으로 나왔었는데...

남자 주인공도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인데, 도저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시 만나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이라..

이쁘게 사랑하는듯..

늦게 본 영화이긴 하지만, 좋은 영화로 오래오래 기억될 것 같다.

by BSang 2012. 3. 1. 14:37


by BSang 2012. 3. 1. 14:36

천문학자와 물리학자, 그리고 수학자가 스코틀랜드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중 들판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 한 마리를 보았다.

천문학자가 말하기를 " 그것 참 신기하군. 스코틀랜드 양들은 죄

다 검은색이잖아?" 이 말을 듣고 있던 물리학자가 천문학자의 말

을 반박하여 " 그게 아니야, 스코틀랜드산 양들 중에서 일부만이

검은색이라고 말해야지." 이들의 말이 한심하다는 듯, 수학자는

하늘을 잠시 쳐다본 뒤 "자네들은 너무 성급한 판단을 내린거야.

스코틀랜드에는 적어도 몸의 한쪽 면 이상의 면적에 검은 털이

나 있는 양이 적어도 한 마리 이상 방목되고 있는 들판이 적어도

하나 이상 존재한다. 이래야 말이 되는 거라구!"

"현대수학의 개념" -- Ian Stewart 에서

이 글에 달린 답글...

천문학자와 물리학자 사이의 분명한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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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스코틀랜드까지 갈 것 없이 한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1990년(?) 어느 봄 날
천문연구원의 조세형 박사, 충남대 천문학과의 김광태 교수, 그리고 물리학자 짱구가
호텔 차 집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둘레가 조금 어두워서 자세한 모양을 알 수 없었지만, 셋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10m 쯤 떨어진 곳에 큰 화분이 있고 거기에 종려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드디어 그 종려 나무가 진짜냐 가짜냐를 두고

두 천문학자가 토론을 시작했다.


"가짜인 것 같다." "진짜인 것 같다." ....

라는 말을 끝없이 주고 받으며 30분이 흘렀다.

마침내 참다 못 한 물리학자 짱구가 소리쳤다.

"아! 가서 만져 보면 될 것 아니오!"

그리고 일어나서 종려나무에 다가가서 만져보고 돌아와서 말했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가짜요."

그러자 물리학자의 행동에 감탄한 조세형 박사가 말했다.

"역시 물리학자와 천문학자는 달라!"

물리학자들은 대부분의 연구 대상을 직접 접하고 웬만한 것을 실험실 안에서 다룬다.
반면 천문학에서는 연구 대상을 직접 만져본다는 개념이 없다. 그저 멀리 있는 것을 관찰할 뿐.

사람이 달에 가서 시료를 가져 온 뒤로, 달은 더 이상 천문학의 연구 대상이 아니다.
천문학이 달을 언급하는 것은 오직 천문학 교육 때문이다.

그럼 주로 어느 학문이 달을 연구하는가? 지질학이다.

-물리 세계로의 즐거운 항해 라는 카페에서 퍼옴-

내가 아는 두 사람이 나와서 더 잼있는듯..

이번 학기는 김광태 교수님의 수업을 듣고 있는중이다.

학부때는 몰랐는데, 교수님의 내공이 대단함을 몸소 체험중...

나중에 나도 그렇게 되고싶다. ^^

p.s 첫번째 얘기에서 천문학자들은 저렇게 단언하지는 않는데...ㅡㅡ;;

by BSang 2012. 3. 1. 14:35

개발자중에 유명하신 분이.. 했던 얘기죠.. 워낙 유명해서
아시는 분은 아는 얘기겠지만..

강이 있습니다. 물살이 아주 셉니다.. 수영해서 강 가운데로 가기에도
힘이 들 정도죠.

그 강을 헤엄쳐서 한 가운데에 바닥부터 벽돌을 쌓기 시작합니다.
한 장 들고가서 쌓아놓고 다시 한 장 들고가서 쌓아놓고..

계속 하다보니 이거 강물 속에 쌓은게 보이지도 않고 힘들기만하고
왜 하나 싶기도 합니다.

대게 많은 사람이 여기서 그만두곤하죠. 어차피 해도 잘 보이지도
않고.. 왜 이런짓까지 하나 싶어서..

하지만, 참고.. 또 참고.. 한 장.. 한 장 계속 쌓습니다..
힘들게 힘들게 쌓다보니 이제 강의 수면 높이까지 쌓았네요..

이제부턴.. 벽돌 쌓는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동안은 수면밑으로 쌓아서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한 장 한 장
쌓을때마다 그 높이가 내 눈에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 눈에도
확연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인생의 목표.. 계획.. 실천.. 노력.. 의지.. 근성..
'강'이라는 물살이 센 인생에 살면서 무언가 그 안에 자신의 목표한 바를
이루기란.. 벽돌쌓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고민도 하고..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기도 하고.. 하소연도 하지만,
아직.. 그런 분들은 수면 높이까지 벽돌을 쌓지 않아서입니다.
언젠가는.. 자신의 눈에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눈에도
보일만큼 무언가 쌓아 올라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고민되고 힘들어도 그 과정 자체가 이미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증거이므로.. 너무 자책하거나 자기비하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모두들.. 힘내세요.

모 동호회에서 퍼온 글..

너무 노력없이 강물 위만 보고 있었던건 아닌지...

좀더 반성해야지..

by BSang 2012. 3. 1. 14:33

상좌에게 절을 올리다

중국 당나라때, 복주(福州) 고령사(古靈寺)에 신찬선사(神贊禪師)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처음 출가하여 고향의 대중사(大中寺)에서 은사이신 계현(戒賢)법사를 모시고 있었는데, 계현법사가 불경만 볼 뿐 참선은 하지 않으므로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대의 고승인 백장(百丈)스님 문하로 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마음을 깨쳐 견성(見性)하고 다시 계현법사에게로 돌아왔습니다.

"내 곁을 떠난 뒤 무엇을 하다가 왔느냐?"

"달리 한 일은 없습니다."

"고얀놈, 아무 일 없이 나를 떠나 네 마음대로 돌아다니다니. 산에 가서 나무나 해오너라."

신천스님이 나무를 해 오자 이번에는 목욕탕에 물을 데우라고 하였습니다. 물이 더워지자 계현선사는 목욕을 하면서 등을 밀라고 하였고, 신찬선사는 등을 밀면서 말하였습니다.

"어허, 좋고 좋은 법당이로구나. 그런데 법당은 좋지만 부처님이 영험하지 못하구나."

계현법사가 그 소리를 듣고 뒤돌아보자 선사는 나지막히 속삭였습니다.

"부처가 영험은 없으나 방광은 하는구나."

그러나 계현법사는 이 말들을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 얼마 후, 계현법사가 창문 앞에서 불경을 보고 있는데, 벌 한 마리가 열린 쪽문을 놔두고 닫힌 창문으로 나가려고 바둥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것을 보고 있던 신찬스님이 게송을 읊었습니다.

열린 문으로 나가려 하지 않고

봉창을 두드리니 참으로 어리석다.

백년 동안 경책을 들여다본들

어느 날에나 나갈 수 있겠는가.

空門不肯出 投窓也大痴

百年鑽古紙 何日出頭日

계현법사는 그 게송을 듣고 생각해 보니, 지난번 목묙탕에서 들은 말과 함께 웬지 예사롭지가 아니한 것 같아 신찬선사를 불렀습니다.

"바른대로 말하여라. 어느 스님을 찾아다니며 공부를 했느냐?"

"예, 백장스님 문하에서 공부를 하고 한 생각 달라졌습니다."

계현법사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밖으로 뛰어나가 대종을 울리며 외쳤습니다.

"내 상좌가 성불했으니 법문을 들으러 오시오."

산중의 모든 대중을 모아 놓고 계현법사는 상좌에게 절을 하고 법문을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신찬스님은 서슴치 않고 상당하여 설법하였습니다.

신령한 광명이 홀로 드러나서

육근육진의 모든 분별을 벗어났네.

그 자체가 항상 참됨을 드러내어

언어문자에 걸리지 않는다.

진성은 더럽혀지지않고

본래부터 원만히 성취되어 있네.

다만 허망한 인연만 떨쳐 버려라.

곧 그대가 부처이니라.

靈光獨露 逈脫根塵

骨露眞常 不拘文字

眞性無染 本自圓成

但離妄緣 卽如如佛

그리고서 주장자를 굴리자, 계현법사는 크게 발심하여 다시 절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습니다.

"내 이렿게 늙어서 상좌에게 극치법문을 들을 줄 기대나 했겠는가? 모두 부처님의 은혜이로구나"

큰스님의 법문에서 들은 이야기

예전에 하고 싶었던 것 중의 하나가, 스님을 따라다니면서 법문을 듣는 거였는데, 요즘은 스님의 법문을 들으려면

시디나 카세트 테이프를 이용해야한다. 슬픈현실이다..ㅜㅜ

by BSang 2012. 3. 1. 14:33

하얀 카네이션의 꽃말은..

내 사랑은 살아있어



콤파스? 왜 아직도 이런걸..?

냅둬, 부적이야.

별로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우주비행사가 위아래도 없는 공간에서 가장 알고싶은 것은 방위래..

그래서 이런걸 부적으로 삼는 모양이야.

뭐가 적혀있는데, 뚜껑 안쪽에..

아! 보면 안돼!

왜?

부부간에도 비밀은 필요하다고 봐. 부적이기도 하고..

부적이라..



Please save Yuri




부인을 마음속에서 떠나보내는 유리..

특이한 소재를 주제로 한 애니..

우주궤도에서 떠도는 쓰레기에 대한 얘기들..

어쩌면 우주환경이란 말이 우주쓰레기와 관련된 문제에 더 잘 어울리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암에 걸린 사실을 제자에게 숨기는 스승..

그런 스승을 바라보면서 선배에게 말하지 못하는 후배..

남들이 다 휴가를 쓸때도 동물들을 돌보면서 연차를 쓰지 않는다고 상사에게 구박받는 사람,

시간이 날때마다 데브리(우주쓰레기) 목록을 검색하는 사람..

언제나 하얀 카네이션 한송이를 토이박스(우주선)에 장식해 두는 사람..

부인의 흔적을 찾기위해 데브리를 청소하다 발견한 컴파스..

그속에 씌여있던 부인의 메세지..

그리고 그 부인을 떠나보내는 사람..

동료지만..동료라서 알리기 싫은 것도 있다는것..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주는 장면들..








by BSang 2012. 3. 1. 14:31

너무 좋아할 것도 너무 싫어할 것도 없다.
너무 좋아해도 괴롭고, 너무 미워해도 괴롭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고, 겪고 있는 모든 괴로움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이 두 가지 분별에서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늙는 괴로움도 젊음을 좋아하는 데서 오고,
병의 괴로움도 건강을 좋아하는 데서 오며,
죽음 또한 삶을 좋아함, 즉 살고자 하는 집착에서 오고,
사랑의 아픔도 사람을 좋아하는 데서 오고,
가난의 괴로움도 부유함을 좋아하는 데서 오고,

이렇듯 모든 괴로움은 좋고 싫은 두 가지 분별로 인해 온다.

좋고 싫은 것만 없다면 괴로울 것도 없고
마음은 고요한 평화에 이른다.

그렇다고
사랑하지도 말고, 미워하지도 말고
그냥 돌 처럼 무감각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다.

사랑을 하되 집착이 없어야 하고,
미워하더라도 거기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사랑이든 미움이든 마음이 그 곳에 딱 머물러
집착하게 되면 그 때부터 분별의 괴로움은 시작된다.

사랑이 오면 사랑을 하고, 미움이 오면 미워하되
머무는 바 없이 해야 한다.

인연 따라 마음을 일으키고,
인연 따라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집착만은 놓아야 한다.

법상스님. 

by BSang 2012. 3. 1. 14:28

결혼은 사랑하는 두 사람의 결합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결혼한 후에는 행복이 넘치는 삶이 당연히 펼쳐질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살아보니 부딪히는 일, 불편한 일이 잦게 된다. 갈등이 싹트고 자라기 시작한다. 이윽고 회의하기 시작한다. 그녀가 변했나? 어떻게 사람이 달라질 수 있을까? 그이가 아직도 나를 사랑하는 것인가? 그리고는 항변하기 시작한다. 당신은 왜....? 거친 말이 오가다 보면 잘못된 길을 온 것 같은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유혹에 시달린다. 이런 파국의 위협을 푸는 열쇠는 매우 간단하다. 되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갈등이 행복에 이르는 자연스런 과정임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결혼 전 사람들은 혼자 사는데 익숙해 있다. 대개 방을 혼자 쓴다. 그 방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소리높여 들어도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다. 아무리 늦더라도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잠자리에 들면 되고, 공휴일에 창밖에 해가 높이 솟아오를 때까지 일어나지 않고 자더라도 잔소리 받을 일이 없다. 아직 쓰지 않은 그릇이 남아있다면 식사 후 설거지를 며칠 쌓아 둔들 누가 뭐라 하랴. 또 주말에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시간 계획을 세울 것이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돈을 쓰면 된다. 속박이 없다. 자유다. 그러나... 오늘 낮에 직장에서 겪었던 답답했던 일, 종종 생기는 기쁜 사연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다. 그리고 나는 나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또 하나의 속박이다.


결혼함으로써 사람들은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는 속박에서 벗어나길 시도한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복속시키는 약속이다. 결혼한 사람들은 더 이상 방을 혼자 쓸 수 없다. 자고 깨는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사랑하는 이에게 맞춰야 한다. 욕실 사용하는 방식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맞춰야 한다. 샤워하느라고 안경을 벗었기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머리카락을, 이제는 불편하더라도 안경을 찾아 쓰고 확인하고 깨끗이 주워 담아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맞추기 위한 속박이 늘어간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맞추지 못한다는 불만도 늘어간다. 갈등이다.


갈등은 우리가 다듬어지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갈등은 우리가 훈련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혼 생활에서 겪게 되는 갈등은 우리가 자신을 낮추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복종하는 훈련이다. 훈련은 힘들고 때로는 가혹하다. 그러나 훈련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기쁘게 받는 사람은 매우 값지다. 그리고 훈련 기간이 단축된다. 훈련을 거부하고 원망하는 사람은 그냥 그대로이거나 퇴보한다. 그리고 훈련 기간은 연장된다.


결혼 후 갈등이라는 훈련을 성공적으로 이수한 부부는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으로 강하게 속박되어 있음을 안다. 그들이 실제로 느끼는 것은 속박이 아니라 자유다. 그들은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속박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에게 구속된 것이 자신들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이전에 홀로 있을 때가 얼마나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상태였는지를 안다. 그리고 이제는 서로가 서로의 부족함을 얼마나 멋지게 채우고 있는지를 깨닫는다. 그리고 자기의 주인은 자기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임을 안다.

교수님이 쓰신 '갈등의 이유' 라는 글에서 발췌한 글..이것도 불펌이려나..^^;;

언젠가 교수님과 같이 서울에 올라오면서 여러가지 얘기를 해 주신적이 있었다. 결혼과 남녀간의 사이에 관련된 얘기들..시간이 날 때 제자들에게 가끔씩 얘기하신다는 말씀과 함께..

그 때 하신 말씀 중 교수님 자신은 교회를 다니면서 가족의 평안과 안식을 얻는다는 말씀을 하셨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것들을 지켜나가는지 궁금하다는 말씀도 하셨구. 위에 적은 글도, 교수님이 겪으면서 느꼈던 생각을 적은 글인듯..

교수님과 같이 얘길하면 내가 아직도 많이 미숙하다는 사실을 느낀다. 그리고 그런 나를 아무런 선입관없이 대해주신다는 것에 감사한다.

담주에는 교수님께 점심이라도 한끼 사드려야지..^^

by BSang 2012. 3. 1. 14:27

오랜 직장생활을 IT분야의 시스템관리자로 보내서 인지 저에게 자연스럽게 몸에 밴 습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어떤 사고가 발생했을때 사고의 원인을 따지기 보다는 결론을 먼저 생각하고 신속하게 최선의 마무리를 짓기위한 모드로 생각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현역 엔지니어시절 그리고 관리자시절 수많은 시스템장애와 사고들을 겪었습니다.
대부분 실시간으로 운영되는 시스템이 장애발생으로 운영이 중단된다든가 프로그램 에러가 발생하여 예상치못한 사고가 발생하는 경우 상황은 매우 긴급하게 돌아가고 경우에 따라서 심각한 상황으로 전개되기도 합니다.

시스템이 어떻게 운영되는지에 대해 별 관심이 없던 타부서장이나 회사의 임원들도 장애가 발생하게 되면 한꺼번에 들이닦쳐 눈에 불을켜고 운영부서를 비난하는 상황이기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냉정을 찾고 수순대로 원상복구를 하는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의 성격에따라 달라지지만 일부 직원들은 얼굴이 창백해지고 어쩔줄을 몰라 허둥대다가 시간만 소모하는 경우도 적잖게 보았습니다. 그런 상황이 발생하게 되면 저의 경우 가능한 일을 단순하게 정리하고 어떻게 하면 현상황에서 최선의 마무리를 지을수 있는지를 생각하였습니다.

최악의 경우 어느선까지 데이타를 복구할수 있는가 ?
원상태로 복구하는데 최악의 경우 얼마의 시간이 걸릴수 있는가 ?
데이타가 유실된다면 현업에서 가지고 있는 자료를 동원하여 어느정도까지 복구할수 있는가?
신속하게 시스템복구가 되지 않으면 우회하여 일을 진행할수 있는 방법은 어떤것이 있는가?
벤더 또는 제품공급업체의 엔지니어들은 대기중인가 ?
등등...

최선의 결과가 아닌 최악의 시나리오를 대비하여 최선의 수습방안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타부서장들과 임원들에게 브리핑을 하였습니다.

사고가 터지면 그 원인을 따지느라 시간을 소모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최선의 마무리를 지을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하였기 때문인지 부서장 시절 사고를 친 부서직원들에게 책임을 물어 심하게 문책을 한 기억이 없는것 같습니다.

간혹 부서직원들의 잘못을 일일이 들춰내며 상사와 같이 담당자를 비난하는 중간간부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때로는 관련자에게 분명한 책임을 물어 다시는 그런일이 반복되지 않게 각성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굳이 제가 그런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은 그런 장애가 발생되면 가장 공포에 휩싸이는 것이 바로 담당자 입니다.
그런 담당자를 다시 불러 잘못에 대해 추궁을 하는것은 그 직원의 적극적인 직장생활을 위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고가 터지면 순간적으로 생각이 수습모드로 전환되는 것은 회사생활 밖에서도 그대로 습관이 되어 나타납니다.
이미 일이 발생했거나 어차피 피해갈수 없는 상황이라면 왜 그지경까지 왔는지에 대해 에너지를 소모하며 논쟁하는 것을 가능한 피하고 어떻게 하면 현 상황에서 최선의 마무리를 지을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회사업무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몸에 베인 습관이 아직까지는 실생활을 하는데 있어 그다지 나쁘게 작용된적은 없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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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이 적어놓으신 글..

경륜이 느껴지는 글..

이런 분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정말 좋을듯..

나도 이렇게 될 수 있으려나...

by BSang 2012. 3. 1. 1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