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문의 선택과 후회


이조 때 만고충신 성삼문은 글로도 유명한대문장가였다. 그가 벼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버지 성승대감은 성삼문에게 강릉에 있는 정대감한테 가서 빌려준 돈을 받아오라고 시켰다. 아버지의 명을 받고 강릉으로 길을 떠난 성삼문이 대관령에 이르러 날이 저물었는데 초행길에 날은 어둡고 부근에 인가는 안보여 곤경에 처해있을 때 한 동자가 앞에 나타나 “소대감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했다. 성삼문은 말을 멈추고 “그대는 누구이기에 이토록 어두운 밤에 나를 알아보는가?” 물으니 “네, 저는 스승의 명을 받고 이곳에서 소대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너의 스승은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나를 기다렸는가?”, “저의 스승님의 존호는 소릉선사이신데 소대감께서 저물 때 즈음 이 곳을 지날 것이니 기다렸다가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곤경에 처해있던 성삼문은 동자를 따라 얼마쯤 산길을 들어가니 조그마한 초막이 하나 있었다. 동자가 안내하는 방에 들어가니 소릉선사께서 성삼문을 보시고 “초행길에 고생이 많았지? 나를 알아보겠는가?”

“네, 알겠습니다.” 소릉선사는 성삼문 아버지의 옛 친구였으므로 성삼문이 어렸을 때 몇 번 본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저녁식사를 마치자 소릉선사는 “삼문이 나하고 달구경이나 갈까?”, “오늘이 그믐이 아닙니까?” 하고 성삼문은 의아해서 반문했다.

그러자 소릉선사께서는 “그믐에도 달을 볼 수 있지” 하고 웃으시며 먼저 밖으로 나가자 삼문도 하는 수 없이 선사의 뒤를 따라 누각에 올라있자니 잠시 후에 쟁반같이 둥근달이 환하게 나타나는 것이었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성삼문은 아무리 눈을 닦고 정신을 가다듬어 봐도 틀림없는 달이었으며 또한 꿈도 아니었다.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晦夜墨天에 引三間하고 登空中樓閣하여 翫月歌하다 *그믐 회晦,가지고 놀 완翫*

 그때 소릉선사께서는 “선문이 자네 글을 좀하지? 내가 무상시를 한수 읊을 테니 들어보게”

하고 낭랑한 음성으로 다음과 같이 읊으셨다.

하늘도 땅도 허무한 것, 그 가운데 삼라만상 한없이 벌어있네.

해도 달도 허무한 것, 뜨고 진들 무슨 공인가?

처자식도 허무한 것, 황천길엔 못 만나리.

부도 귀도 허무한 것, 피어나면 시드는 영산홍과 같은 것.

대집경 가운데는 공을 색이라 했고 반야경 가운데는 색을 곧 공이라 했네.

대장부가 참된 진리를 만났거든 속세를 벗어나서 지공을 깨달아라.

옛날이나 지금이나 명리길을 두고 보면 인생이 흡사 꿀을 모으는 꿀벌 같아 백화의 골을 모아 꿀을 빚어놓은 후에 한꺼번에 잃게 되니 죽도록 신고한 것이 일장허무뿐이로다.

千也空 地也空 하니 萬象森羅가 列共中 이로다.

日也空 月也空 하니 來來往往 有何功가 妻也空 子也空 하니 黃天路上不相逢 이라.

富也空 貴也空 하니 朝開暮落 映山紅 이라 大集經中엔 色卽空이라 

大丈夫 遇眞訣 커든 脫塵離俗 悟眞空 하라.

古往今來 名利路 는 人生恰似 採花蜂 하야 釀得百花 成蜜後 에 到頭辛苦 一場空 이라.

이와 같이 무상시를 읊으신 후 소릉선사께서는 성삼문을 보시고 세상사란 지나고 보면 허무한 것이니 그만 여기서 수도나 하라고 권하셨다. 그러나 성삼문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높은 벼슬과 천하가 부러워하는 문장의 명예와 꽃 같은 아내를 버리고 도저히 수도할 용기가나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식사를 마친 후에 “세상에서 좀 더 살아보고 나중에 수도하겠습니다.” 하고 선사께 작별인사를 드리니 선사께서는 “정히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하시며 접은 종이 한 장을 내주시었다. 삼문이 받아서 펴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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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스물 넉자의 처음 보는 글자가 적혀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나에게 있는 반글자를 너에게 부치노니 네가 이것을 붙여 글자를 만들어 세상을 이롭게 하면 그 공이 적지 않아서 명을 마치고 오는 세상에는 마땅히 해탈을 얻으리라” 吾有半文을 咐囑汝 하노니 汝當合字하여 利用於世하면 其功不小하여 命終來生에는 當得解脫하리라 라고 쓰여 있었다.

집에 돌아온 성삼문은 소릉선사가 주신 반자를 성균관 학자들과 같이 연구하여 우리 국문을 지었는데 발음을 조정하기 위하여 만주 요동에 정배와 있던 중국의대문장가를 열세번이나 찾아갔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훈민정음이 탄생되어 세상에 공표된 뒤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성삼문은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형세는 불리하기만 했다. 그렇게 되자 성삼문은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세상무상을 느낀 나머지 소릉선사의 협조를 얻어 단종복위를 할 수 있을지 불가능하면 수도나 할 작정으로 간단한 행구를 차려 언젠가 한 번 갔던 기억을 더듬어 여러 날 헤맨 끝에 그곳을 찾았으나 선사와 동자는 어디로 갔는지 빈 집만 남아있었다. 그래서 선사가 거처하시던 방문을 열어보니 벽에다 큰 먹글씨로 “피는 천추에 흘러있고 이름은 만고에 전하리라”

“血流는 千秋에 名傳은 萬古 하리라” 라고 쓰여 있었다.

성삼문은 이 글을 보고 세조에게 참혹한 죽음을 당할 것을 미리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소릉선사의 무상시와 같이 세상 일이 허무한 것을 탄식하고 선사가 권하실 때 수도하지 못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였으나 선사를 만날 길은 없고 때는 이미 늦었으니 하는 수없이 돌아와 결국 참혹한 형벌을 받고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LotusGM 님의 블로그 글에서 발췌..




예전에 큰스님께서 내게 성삼문 얘기를 해 주신적이 있었다.

위 얘기처럼 자세한 얘기는 아니었고, 죽기전에 스님이 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고..

GM님께 듣기로는 요즘 여러 번 법문하실때 성삼문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여러가지로...생각을 하게 만드는 얘기..



by BSang 2016. 6. 26. 2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