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문의 선택과 후회


이조 때 만고충신 성삼문은 글로도 유명한대문장가였다. 그가 벼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버지 성승대감은 성삼문에게 강릉에 있는 정대감한테 가서 빌려준 돈을 받아오라고 시켰다. 아버지의 명을 받고 강릉으로 길을 떠난 성삼문이 대관령에 이르러 날이 저물었는데 초행길에 날은 어둡고 부근에 인가는 안보여 곤경에 처해있을 때 한 동자가 앞에 나타나 “소대감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했다. 성삼문은 말을 멈추고 “그대는 누구이기에 이토록 어두운 밤에 나를 알아보는가?” 물으니 “네, 저는 스승의 명을 받고 이곳에서 소대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너의 스승은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나를 기다렸는가?”, “저의 스승님의 존호는 소릉선사이신데 소대감께서 저물 때 즈음 이 곳을 지날 것이니 기다렸다가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곤경에 처해있던 성삼문은 동자를 따라 얼마쯤 산길을 들어가니 조그마한 초막이 하나 있었다. 동자가 안내하는 방에 들어가니 소릉선사께서 성삼문을 보시고 “초행길에 고생이 많았지? 나를 알아보겠는가?”

“네, 알겠습니다.” 소릉선사는 성삼문 아버지의 옛 친구였으므로 성삼문이 어렸을 때 몇 번 본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저녁식사를 마치자 소릉선사는 “삼문이 나하고 달구경이나 갈까?”, “오늘이 그믐이 아닙니까?” 하고 성삼문은 의아해서 반문했다.

그러자 소릉선사께서는 “그믐에도 달을 볼 수 있지” 하고 웃으시며 먼저 밖으로 나가자 삼문도 하는 수 없이 선사의 뒤를 따라 누각에 올라있자니 잠시 후에 쟁반같이 둥근달이 환하게 나타나는 것이었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성삼문은 아무리 눈을 닦고 정신을 가다듬어 봐도 틀림없는 달이었으며 또한 꿈도 아니었다.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晦夜墨天에 引三間하고 登空中樓閣하여 翫月歌하다 *그믐 회晦,가지고 놀 완翫*

 그때 소릉선사께서는 “선문이 자네 글을 좀하지? 내가 무상시를 한수 읊을 테니 들어보게”

하고 낭랑한 음성으로 다음과 같이 읊으셨다.

하늘도 땅도 허무한 것, 그 가운데 삼라만상 한없이 벌어있네.

해도 달도 허무한 것, 뜨고 진들 무슨 공인가?

처자식도 허무한 것, 황천길엔 못 만나리.

부도 귀도 허무한 것, 피어나면 시드는 영산홍과 같은 것.

대집경 가운데는 공을 색이라 했고 반야경 가운데는 색을 곧 공이라 했네.

대장부가 참된 진리를 만났거든 속세를 벗어나서 지공을 깨달아라.

옛날이나 지금이나 명리길을 두고 보면 인생이 흡사 꿀을 모으는 꿀벌 같아 백화의 골을 모아 꿀을 빚어놓은 후에 한꺼번에 잃게 되니 죽도록 신고한 것이 일장허무뿐이로다.

千也空 地也空 하니 萬象森羅가 列共中 이로다.

日也空 月也空 하니 來來往往 有何功가 妻也空 子也空 하니 黃天路上不相逢 이라.

富也空 貴也空 하니 朝開暮落 映山紅 이라 大集經中엔 色卽空이라 

大丈夫 遇眞訣 커든 脫塵離俗 悟眞空 하라.

古往今來 名利路 는 人生恰似 採花蜂 하야 釀得百花 成蜜後 에 到頭辛苦 一場空 이라.

이와 같이 무상시를 읊으신 후 소릉선사께서는 성삼문을 보시고 세상사란 지나고 보면 허무한 것이니 그만 여기서 수도나 하라고 권하셨다. 그러나 성삼문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높은 벼슬과 천하가 부러워하는 문장의 명예와 꽃 같은 아내를 버리고 도저히 수도할 용기가나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식사를 마친 후에 “세상에서 좀 더 살아보고 나중에 수도하겠습니다.” 하고 선사께 작별인사를 드리니 선사께서는 “정히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하시며 접은 종이 한 장을 내주시었다. 삼문이 받아서 펴보니


ㄱㄴㄷㄹㅁㅂㅅㅇㅈㅊㅋㅌㅍㅎ ㅏㅑㅓㅕㅗㅛㅜㅠㅡㅣ


처음 보는 스물 넉자의 처음 보는 글자가 적혀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나에게 있는 반글자를 너에게 부치노니 네가 이것을 붙여 글자를 만들어 세상을 이롭게 하면 그 공이 적지 않아서 명을 마치고 오는 세상에는 마땅히 해탈을 얻으리라” 吾有半文을 咐囑汝 하노니 汝當合字하여 利用於世하면 其功不小하여 命終來生에는 當得解脫하리라 라고 쓰여 있었다.

집에 돌아온 성삼문은 소릉선사가 주신 반자를 성균관 학자들과 같이 연구하여 우리 국문을 지었는데 발음을 조정하기 위하여 만주 요동에 정배와 있던 중국의대문장가를 열세번이나 찾아갔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훈민정음이 탄생되어 세상에 공표된 뒤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성삼문은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형세는 불리하기만 했다. 그렇게 되자 성삼문은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세상무상을 느낀 나머지 소릉선사의 협조를 얻어 단종복위를 할 수 있을지 불가능하면 수도나 할 작정으로 간단한 행구를 차려 언젠가 한 번 갔던 기억을 더듬어 여러 날 헤맨 끝에 그곳을 찾았으나 선사와 동자는 어디로 갔는지 빈 집만 남아있었다. 그래서 선사가 거처하시던 방문을 열어보니 벽에다 큰 먹글씨로 “피는 천추에 흘러있고 이름은 만고에 전하리라”

“血流는 千秋에 名傳은 萬古 하리라” 라고 쓰여 있었다.

성삼문은 이 글을 보고 세조에게 참혹한 죽음을 당할 것을 미리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소릉선사의 무상시와 같이 세상 일이 허무한 것을 탄식하고 선사가 권하실 때 수도하지 못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였으나 선사를 만날 길은 없고 때는 이미 늦었으니 하는 수없이 돌아와 결국 참혹한 형벌을 받고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LotusGM 님의 블로그 글에서 발췌..




예전에 큰스님께서 내게 성삼문 얘기를 해 주신적이 있었다.

위 얘기처럼 자세한 얘기는 아니었고, 죽기전에 스님이 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고..

GM님께 듣기로는 요즘 여러 번 법문하실때 성삼문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여러가지로...생각을 하게 만드는 얘기..



by BSang 2016. 6. 26. 22:37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아도 화상은 고구려에서 태어나셨다. 위나라 사신 아굴마를 아버지로 하고 고구려 여인 고도령을 어머니로 탄생하시어 아도라는 이름은 아버지 아굴마라는 아 자와 어머니 고도령 이라는 도 를 따서 아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아도는 아버지 아굴마가 사신으로 고구려에 와서 머무르는 동안에 고도령을 만나서 아도를 낳게 되었다. 아버지는 위나라로 돌아가게 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게 되어 함께 자라난 동네 친구들이 아버지 없는 아이라고 놀림으로써 아버지가 불현듯 보고싶어 16세 어린 나이에 아버님을 찾아 위나라로 가서 아버님인 아굴마를 만나뵈었으나 아버님은 위나라의 재상으로 단란한 가정을 가지고 계셨으므로 떳떳하게 아들로 행세할 수 없으므로 아버님의 권유에 의하여 위나라 서울 낙양에 자리잡은 백마사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백마사는 최초로 중국에 불법을 전한 축법난이 불사리와 불경을 백마등에 싣고 와서 절을 지었으므로 백마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아도스님은 그곳 백마사에서 수도생활을 하는것보다는 고국 고구려로 돌아가서 떳떳하게 수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아버님께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말씀드렸더니 아버님 아굴마도 쾌히 승낙하시면서 백마사에 모셔진 사리를 고구려로 떠나는 아들 아도에게 분과하여 모시고 가게하였다. 고구려로 돌아온 아도는 어머님 고도령의 분부에 따라 불교가 전해지지 아니한 신라에 불법을 전하기 위하여 불사리를 모시고 신라땅으로 오시게 되었다. 신라 땅에 처음 오신 곳은 지금 경상북도 구미시, 도개면 도개동이다. 도개라는 이름도 위인이 와서 처음 도를 여신 곳이라고 하여 도개라 한다. 그곳에 와서 때를 기다리면서 모래장자라고 하는 사람의 집에서 10년동안 목부 생활을 하다가 최초로 지은 절이 태조산 도리사이며 아도가 모시고 온 불사리 중 가장 큰 사리 일과를 그곳 도리사에 모시고 수행하던 중 어느날 포행 중에 뒷산을 넘어가니 산중턱 연못에 흰 연꽃이 피었는데, 그 연꽃에서 푸른빛이 방광하므로 산명을 푸른빛이 방광한 곳이라 하여 청화산이라고 명명하고 그 산에 절을 지어 흰 연꽃이 핀 곳이라 하여 백련사라 하였으며 아도스님께서 모시고 온 사리를 백면사에 전부 모시게 되었다.

그 후 백련사는 사세가 번창하여 이조말엽 고종황제 시절까지 내려오다가 비안 현감의 직권에 의하여 소실되게 되었다. 비안 현감은 대웅전 자리에 조상묘소를 쓰기 위해서 백련사를 소실시킨 것이다. 그 때 백련사 재산중 부동산은 비안현으로 귀속시키고 동산은 도리사와 청화산 법주사에 귀속하게 되었다. 그때 백련사 스님들은 백련산 정수암으로 이주하여 백련사 복원을 발원했으나 두점화상과 도암선사, 성암강백 삼대를 내려오면서까지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68년 무신년 2월 백련사를 복원하라는 위촉과 함께 묘허당 혜원스님께 전해주었던 불사리 중 00과를 00산 00사 스님께 분과하여 기증하게 된 것입니다.



세존 진신사리 연기문..

여기에 들어가는 00 절은 스님과 관련있는 절들..신흥선원, 원명사, 방곡사 등..

불광사도 그런지 잘 모르겠음..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부처님 사리를 불상 대신에 사리탑에 모시고, 바깥에 있는 탑에도 사리를 봉안했었다.

그래서 우리절들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불상 대신에 사리탑이 대웅전에 모셔져 있음..세존진신사리 봉안도량 이라고 적혀있기도 하구..

프린트 된 종이가 있길래 버리기 전에 내용은 적어둬야할거 같아서 적어봄..

by BSang 2015. 5. 16. 19:57


88년 대학가요제 그대에게 (무한궤도)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 대학가요제




라디오스타에서 윤종신이 항상 놀리는 문제의 타이거 ㅎㅎ



꽃게랑 도 있었네? 이건 넥스트시절이구나..ㅋ






by BSang 2014. 9. 19. 00:23



블로그 주소 : http://blog.naver.com/erounnet/220089546249


재활용 병을 기기에 넣으면 기기에서 일정량의 사료가 나오고, 그것을 길거리의 개나 고양이들이 먹는다고..

병에 남은 물 역시 기기에 부을 수 있게 되어있고, 그걸 재활용할수 있다고 함..

터키에 설치된 기기라고..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보게 된 페이지와 동영상..

거리에 돌아다니는 동물을 위한 장치라고 하길래, 

동영상을 보고서 "저런 기기가 우리나라에도 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하다가,

게시물 하단에 달려있는 덧글들을 보게 됐다.


덧글들에는 여러가지 의견들이 달려있었다.

저런 기기로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긴 하지만 배변같은 문제는 어쩔 것이냐는 사람부터,

저렇게 먹을걸 주다가, 피치못할 사정으로 못주거나 그렇게 되면 그 동물들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라는 의견,

인간은 자연의 일부 라고 주장하는 사람부터,

사람이 우선인것은 당연하며, 그 다음에 다른 동물들을 생각해야 한다는 의견 등등..


의견들이 너무 다양했고, 각각의 사람들이 말하는 입장 역시 이해가 되었다.

단순히 좋아보인다고 도입할수는 없는 문제인듯..


고양이와 관련된 내용들을 많이 접하고, 사진들을 보면서 많이 익숙해진 편이다.

길고양이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이 보고, 또 먹을것을 챙겨주는 사람들도 봤다.

과연 어느것이 옳은 것인지..

by BSang 2014. 9. 9. 20:49

All the world is full of suffering. It is also full of overcoming.


Life is a succession of lessons which must be lived to be understood.


Keep your face to the sunshine and you cannot see a shadow.


Optimism is the faith that leads to achievement. Nothing can be done without hope and confidence.


Never bend your head. Always hold it high. Look the world straight in the eye.


-Helen Keller-




정은이의 페북에 올려져 있던 글..

스크랩해옴..

여러 장애를 이겨낸 사람이어서 그런지 새삼스레 느껴지는 글.. 

by BSang 2014. 3. 25. 23:06





방금전 페북에서 본 내용..

실제로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글이 올라와 있음..-_-;;



대통령 출마때문에 강의를 못한다 라..

뭐 이건 폴리페서의 범주를 넘어선 듯..ㅎ


중국도 그렇고, 이스라엘도 이공계를 나온 사람이 국가의 지도자가 된 경우가 있다는데

우리나라는 언제쯤 그렇게 될까..

후진타오, 원자바오, 장쩌민, 리펑 같은 사람들이 모두 이공계였고,

이스라엘의 경우, 초대 대통령이 화학자였다고..

by BSang 2014. 2. 4. 22:34

자존감이 높은 사람


- 자기 신체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


- 공감능력이 높다. 남의 감정을 파악하는 능력을 EQ라고 하는데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EQ도 높다


- 리더가 된다. 리더는 사람들 좋아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잠재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돕는다. 갈등을 풀고 생산적인 결과를 도출해 낸다


인정이 많고 자신감이 있으며 미래에 대해서 희망적이기 때문에 따르는 사람도 많다.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다. 사람들은 안심하고 그를 따르며 성공 경험도 많이 한다. 그래서 그는 리 더가 된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


- 자기의 눈, 코, 체중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부끄럽게 생각한다. 자기 외모에 열등감을 심하 게 느낀다


- EQ가 낮다. '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에 신경 쓰느라고 상대방의 감정을 읽을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대방의 감정을 자기 식대로, 부정적으로 해석해 버린다. '나에게 화가 난 거야. 나를 싫어 하고 있어'


좋은 대인 관계를 위해서는 상대방의 감정을 잘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즉, 공감 능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상대방의 감정에 대한 공감 능력이 부족하고 자기 식대로 해석하기 때문에 대인 관계가 힘들다




자존감과 열등감


자존감과 열등감은 자신을 보는 관점에 따라 결정된다. 문제는 조건이 아니라 관점이다


자신에 대한 부정적 관점을 바꾸지 않고서는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존감이란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다. 사람들은 두 가지 면에서 자신을 평가한다




첫째는 자기 가치감이다.


이는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다' ' 나는 남에게 호감을 주는 사람이고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다' 라고 평가할 때 일어나는 감정이다


따라서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사람들을 만날 때 마음이 즐겁고 편하다


상대방의 좋은 반응을 예상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자기가 상대방에게 혐오감을 줄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렇게 예상하는 이유는 스스로 자기는 무가치한 사람이고 싫증나고 지루한 사람, 의존적인 사람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대인기피증도 많다. 그러나 겉으로 이런 내색을 못한다. 세상을 혼자 살 수는 없고 피치 못할 대인 관계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부득이 사람을 만나야 할 때는 구실을 만들어 피하기도 하고, 정 피할 수 없을 때는 따로 화제를 준비하기도 하며,


단둘이 만날 자리를 세 사람 이상이 만나는 자리로 만들어서 불편한 대인 관계를 희석시키기도 한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물건을 살 때도 점원의 눈치를 보느라고 물건 값을 제대로 깎지 못한다


택시를 탔을 때도 기사의 눈치를 본다


불필요한 칭찬도 한다. '운전 참 잘하시네요' 아부 수준이다


거스름돈이 동전일 때는 기사에게 달란 말도 못한다. 그래 놓고는 '내가 왜 그 돈을 포기했지?'라는 생각에 두고 두고 화가 난다


세상 살기가 참 힘든 사람이다


그러나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 기사님, 말씀드리기 좀 그렇습니다만, 동전을 안 주셨네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당당하고 자신을 남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본다




자존감의 두 번째 요소는 자신감이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나는 유능한 사람이다. 내게 맡겨진 일을 잘 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자신감이 있어야 사업도 시작할 수 있다.


자신감이 있어야 프러포즈도 할 수 있다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희망적이다. 시험공부를 하면서도 합격의 희망을 가지고 공부한다


그러나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신감이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기력증에 잘 빠진다


자신은 무능력하기 때문에 '노력해봤자 별 수 없다'는 상태가 무기력의 상태다


무기력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 특히 우울증 환자들의 특징적인 증상 중 하나다.


'나는 안 돼요. 시도해 봤는 걸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어요, 나는 무능해요. 그리고 세상이 너무 험해요 무서워요'


용기도 나지 않고 아무 의욕도 없다


사회적 접촉을 피하고 친구들도 피한다


시험공부를 할 때도 '공부해 봤자 떨어질거야' 라는 자기 예언을 가지고 공부한다


이런 마음으로 공부할 때 공부가 잘될 리가 없다


심리적인 생기를 상실한 사람이다. 무기력은 하나의 타성이 되어 버린다


무슨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거의 자동적으로 '아, 안 되는구나. 역시 난 안 돼'라고 쉽게 포기해 버린다


'나는 할 수 없어. 전에도 그랬어' 라는 무기력증의 타성에 자주 빠진다


자존감이 지나치게 낮을 때 열등감이 생긴다




낮은 자존감의 문제


* 환자들은 지나치게 자기 비하적이다. 이런 자기평가 방식을 깨닫고 바꾸는 것이 치료의 중요한 과제이다


환자들은 자부심을 느낄만한 일을 해 놓고도 자부심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자신을 깎아내린다


어려운 취직 시험에 합격한 청년이 뜻밖에도 '재수가 좋아서 붙은 거에요. 친구는 더 좋은 자리에 들어갔는 걸요' 라고 한다든지,


3개월만에 체중을 5킬로그램이나 빼고 날씬해진 여성이 기뻐하기는 커녕 '아직 멀었어요. 금방 또 뚱뚱해질 건데요. 뭘...' 하고


비관적인 말을 하는 것이다


이들은 이런 부정적 사고방식 자체를 이해하고 고칠 필요가 있다.


한 부인은 누군가 '옷이 참 예쁘네요' 라고 칭찬하면 당황하여 '아니에요. 길거리에서 산 싸구려 옷이에요. 벌써 산 지 2년이 넘은 건데요'


라고 옷을 비하하는 말을 했다


그런데 정신 치료를 받은 후 그녀의 반응이 달라졌다고 했다. 누군가 자기를 칭찬하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기쁘네요. 고맙습니다 ' 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상대도 좋아하고 자신의 기분도 좋아졌다고 했다.


상대방의 칭찬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자존감이 높아진 증거이다. 자존감이 높아지면 정신도 건강해진다




가혹한 초자아(너무 높은 도덕 기준을 강요하고 거기에 미치지 못하면 심한 죄책감을 느끼게 함)


* 이런 초자아를 가진 사람은 항상 '나는 부족한 사람이야. 제대로 할 줄 아는게 아무것도 없어.' 라고 평가하거나 혹은


'나는 죄인이야. 나는 벌 받을거야. 사람들 보기가 부끄러워'라고 자기를 책망한다.


이런 성격은 자존감을 무너뜨린다. 인생을 즐길 줄도 모른다. '나는 즐길 자격도 없는 놈이야' 라고 초자아가 가로막기 때문이다


아내와 성생활도 못하고 지나친 금욕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죄책감이 심하기 때문에 처벌 불안이 높다


* 평소에 지나치게 완벽을 추구하고 양심의 가책을 쉽게 받는 사람들이 여기에 잘 빠진다.


남의 비난을 듣지 않으려고 과도하게 신경 쓰는 사람들이다. 예의바르고 약속 잘 지키고 희생적이고 빈틈없는 사람들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성공한 사람인데도 막상 자신은 열등감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성격적인 문제를 가진 이들이다


* 자학적 성격을 가진 이들은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 지나치게 희생적인 생활을 한다


가족은 끼니를 굶고 있는데 월급을 고아원에 기부하는 사람들이다.


* 낮은 자존감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성격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유년기의 부모와 자신의 관계를 돌아봐야 한다. 부모의 양육 방식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


초자아는 유년기에 형성된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옳고 그름을 가르치는데, 부모의 태도가 아이의 내면에 내재화되면 초자아가 된다


초자아는 아이 마음속에 살고 있는 부모라고 할 수 있다


너무 엄한 부모, 너무 처벌적인 부모가 가혹한 초자아를 만든다


아이다운 잘못에 대해서 지나친 벌을 주는 부모의 자식들이 가혹한 초자아를 갖는다


아이가 도달할 수 없는 너무 높은 이상을 요구하는 것도 문제의 초자아를 만든다


말과 행동이 다른 부모도 아이를 혼란스럽게 한다


예를 들면, '남의 물건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 엄마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아이가 친구 집에서 친구 엄마의 진주 목걸이를 훔쳐 왔다


'엄마 드리려고 가져왔어요' 이때 엄마가 ' 우리 아들이 효자네'하고 감동한다면 아이는 혼란에 빠진다


일관되고 합리적인 초자아를 기대할 수 없다


부모가 너무 나약하고 부드러워도 초자아는 비정상적이 된다




자존감= 성공/욕심


*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성공의 기록을 많이 올리면 자존감이 올라간다.


혹은 자기에게 거는 기대수준인 욕심을 낮출 때도 자존감은 높아진다


현실적인 자신과 이상적인 자신의 차이가 클수록 열등감이 커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신에게 거는 환상적인 기대나 이상을 버리고,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이상을 설정하고 그것을 실현시키는 것이 자존감을 높이 는 방법이다


욕심을 줄이면 자존감이 올라간다. 욕심이 많을수록 자존감은 낮아진다. 사실 모순되는 것같이 보이지만 열등감의 심리에는 욕심 이 숨어 있다. 남을 밟고 우위에 서려는 욕심이다. 돈 많은 부자로서 돈을 자랑하고 싶은 욕심도 있다. 출세해서 남을 힘으로 지배 하고 싶은 욕구가 열등감의 뒤에 은밀히 숨어 있는 경우도 있다


이런 욕심을 채워 주지 못하는 자신의 외모, 능력. 재산이나 집안이 부끄럽고 싫은 것이다. 이런 욕심을 버리면 열등감 극복이 쉬워 진다


*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 성공과 성취 점수를 높이는 것이 좋다. 성공 경험이 많을수록 자존감은 올라간다


반대로 성공 경험이 낮고 실패가 많을수록 자존감은 공격받는다


* 열등감이 심한 사람들은 '나는 완벽해야 해. 내가 완벽하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아야 해. 단 한 사람이라도 나의 약점을 알아서는 안 돼. 나의 약점이 노출되면 참을 수 없는 수치를 당할 거야' 라고 믿고 있다. 완벽주의의 허상에서 벗어나지 않고는 자 존감을 유지할 수 없다


* 자존감을 올리기 위해서는 완벽해야 한다는 압력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자존감이 올라간다


자존감은 완벽해진 다음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 우리는 자신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아왔어' 이렇게 자신에게 말해 줘야 한다


돌이켜 보면 인생의 고비마다 우리는 얼마나 지독한 순간들을 겪어 내었던가? 남들은 우리가 겪은 그 고통을 알 수 없다


참아낸 자신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완벽하지 않은 자신을 비난만 하지 말고 수고를 인정해 주자. 이때 자존감이 살아난다


* 성폭행이나 왕따를 당한 후에 열등감에 빠지는 사람들은 '내가 못나서 그런 일을 당한거야'라며 자기를 비난한다


우리는 스스로에게나 남에게 비난하는 것이 익숙하다


그러나 비난에서 벗어나 마치 곤경에 빠진 다른 사람을 위로하듯 자신을 위로해 보자


자기 위로가 과거의 아픈 경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준다





Snulife에서 퍼온 글..


by BSang 2013. 7. 4. 08:42




불교란 무엇인가? 개시오입..열 개開 보일 시 示깨달을 오悟 들 입立 네글자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개시란,일체 모든 중생들에게 부처님 당신 먼저 깨달음을 열어 보이신 다음에 부처되는 모습을 보여주셨어요.

오입은, 일체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들게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

이 것이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뜻이야. 그래서 위대하고

그래서 그분이 오신 날을 등불로써 환영을 하는 거야 ..그럼 왜 하필 등불이냐?

불은 지혜를 상징하는 거야..천년동안 어두웠던 암실에도 한등불이 일시에 밝혀지는 것과 같이

억겁다생 무명업 어두운 이 마음도 지혜의 점화만 해버리면 밝은 마음으로써 나의 본성을 바로 보고

깨닫자는 것이 바로 불교야.

그래서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환영하기 위해서 몸으로는 등대를 삼고,마음으로는 등잔을 삼고,

믿음으로 심지를 삼고,계행의 기름을 부어 지혜의 점화를 함으로써,그 지혜의 밝은 빛이라야만이

나의 자성을 바로 비추어 볼 수 있다..해탈을 이룰 수 있느니라 고 관심론에서 달마대사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어요.


- 2013년 5월19일 전통사찰순례 입재 익산 숭림사에서-





출처 : lotusgm 님의 블로그..





나보다 스님을 더 자주 뵙는 분..

시간나는대로 스님뵈러가야되는데..

by BSang 2013. 6. 3.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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