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자네가 요즘 슬럼프라고? 나태의 늪에서 좀처럼 헤어나기가 어렵다고?

그런 날들이 하루이틀 계속되면서 이제는 스스로가 미워질만큼, 그런 독한 슬럼프에 빠져있다고?

왜, 나는 슬럼프 없을 것 같아? 이런 편지를 다 했네, 내 얘길 듣고 싶다고.


우선 하나 말해 두지, 나는 슬럼프란 말을 쓰지 않아, 대신 그냥 ‘게으름’이란 말을 쓰지.

슬럼프, 라고 표현하면 왠지 자신을 속이는 것 같아서… 지금부턴 그냥 게으름 또는 나태라고 할께.

나는 늘 그랬어. 한번도 관료제가 견고한 조직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지.

하다 못해 군대도 학교(육군제3사관학교)였다니까? 그렇게 거의 25년을 학생으로 살다가,

어느 날 다시 교수로 위치로 바꾼 것이 다라니까? 복 받은 삶이지만, 어려운 점도 있어.

나를 내치는 상사가 없는 대신, 스스로를 관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게 내 삶이었거든. 그래서 늘 힘들었어,

자기를 꾸준이 관리해야 된다는 사실이. 평생을 두고 나는 ‘자기관리’라는 화두와 싸워왔어.


사람이 기계는 아니잖아… 감정적인 동요가 있거나, 육체적인 피로가 있거나,

아니면 그냥 어쩌다 보면 좀 게을러지고 싶고, 또 그게 오래 가는 게 인지상정이잖아…

교수라는 직업이 밖에서 점검해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슬럼프, 아니 나태에 훨씬 쉽게 그리고 깊게 빠져.

내가 자주 그렇다니깐? 자네들에게 표현을 안해서 그렇지.


난 나태란 관성의 문제라고 생각해. 자전거는 올라타서 첫페달 밟을 때까지가 제일 힘들지.

컴퓨터 켜기도, 자동차 시동걸기도, 사는 것도 마찬가지야.

정지상태를 깨는 첫 힘을 쏟는 모멘텀을 줄 의지가 관성이 치여버리는 현상...

난 그것이 자네가 말하는 ‘슬럼프’의 합당한 정의라고 생각해.

근데, 문제는 말야, 나태한 자신이 싫어진다고 말은 하면서도 그 게으른 일상에 익숙해져서 그걸 즐기고 있단 말이지.

‘슬럼프’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실은 그걸 즐기고 있단 말이지.

실은 자네도 슬럼프를, 아니 오랜만의 연속된 나태를, 지금 즐기고 있는 거라면 이 글을 여기까지만 읽어.

딱 여기까지만 읽을 사람을 위해 덕담까지 한 마디 해줄게. “슬럼프란 더 생산적인 내일을 위한 재충전의 기간이다.”

됐지? 잘 가.


하지만, 위에 쓴 덕담은 거짓말이야. 너무 오래 나태하면 안돼. 자아가 부패하거든,

그러면 네 아름다운 육신과 영혼이 슬퍼지거든, 그러면 너무 아깝거든.

그러니까, ‘정말’ 슬럼프, 아니 나태에서 벗어나겠다고 스스로 각오해. 그리고 이 다음을 읽어.


보통 ‘슬럼프’ 상태에서는 정신이 확 드는 외부적 자극이 자신을 다시 바로 잡아주기를 기다리게 되거든?

어떤 강력한 사건의 발생이나, 친구/선배의 따끔한 한 마디, 혹은 폭음 후 새벽 숙취 속에서 느끼는 어떤 깨달음 같은

것이라도…

그런 걸 느낄 때까지는 자신의 게으름에 대한 자학을 유보하거든? 땍! 정신 차려 이 친구야, 그런 자극은 없어, 아니

면 늘 있어.


정말 중요한 것은 결국 자신이란 말야. 그 자극을 자극으로 받아들이고,

그걸 생활의 실천으로 옮기는 스스로의 노력이 없으면 그런 자극이 백번 있어도 아무 소용 없단 말야.

정말 나태에서 벗어날 참이면 코끝에 스치는 바람에도 삶의 의욕을 찾고, 그러지 않을 참이면 옆에 벼락이 떨어져도

늘 같은 상태라니까?


내가 자네만할 때는 말이지, 가을이면 특히 11월이면, 감상적이 되고 우울해지고 많이 그랬거든?

"자 11월이다, 감상적일 때다" 하고 자기암시를 주기도 하고… 그래 놓고는 그 감정을 해소한다고 술도 마시고, 음악

을 듣고…

그러면 더 감상적이 되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걸 은근히 즐겼어.

딱지가 막 앉은 생채기를 톡톡 건드리면 따끔따끔 아프지만 재밌잖아? 내 젊은 날의 버거움이란 그런 딱지 같은 거였

나봐.


나도 철이 들었나보지? 차츰 해결법을 찾았어.

감정은 육체의 버릇이라는 걸 깨닫게 된거지. 일조량의 부족, 운동량의 부족, 술/담배의 과다…

즐기지 않는 감정적인 문제에 근원이 있다면 그런 거야. 난 정말 감정에서 자유롭고 싶으면 한 4마일 정도를 달려.

오히려 술도 되도록 적게 마시지, 몸이 아니라 마음을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일을 해. 꽤 효과 있어.

더 근원적인 건 '목표'의 문제야. 나태는 목표가 흐려질 때 자주 찾아오거든.

선생님 같은 나이에 무슨 새로운 목표가 있겠니? 내 목표란 '좋은 선생' '좋은 학자' 되는 건데,

그 '좋은' 이라는게 무척 애매하거든. 목표는 원대할수록 좋지만, 너무 멀면 동인이 되기 힘들어.

그래서 나 같은 경우엔 더 작고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지. 대개 일주일이나 한달짜리 목표들…


슬럼프에서 벗어나고 싶어? '정말로' 원한다면 해결은 생각보다 쉬워. '오늘' 해결하면 되.

늘 '오늘'이 중요해.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뭐 이런 차원이 아니야.

그냥 오늘 자전거의 첫페달을 밟고 그걸로 만족하면 되. 그런 오늘들이 무섭게 빠른 속도로 모이거든,

나태가 관성인 것처럼 분주함도 관성이 되거든.


사실은 선생님도 먼 나라에 혼자 떨어져서 요즘 감정적으로 무척 힘들어.

그래서 물리적인 생활을 무너뜨리지 않으려고 굉장히 노력해. 육체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했잖아?

늦게 자지 않고, 일찍 일어나고, 술 마시지 않고, 햇빛 아래서 많이 움직이고 걷고 뛰고,

꼭 1시간은 색스폰 연습하고, 몇 글자라도 읽고, 3페이지 이상 글쓰고…

나는 잘 알거든, 이런 육체적인 것들이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이 나태 속으로 빠지게 되는걸. 여러 번 경험했거든.


힘 내. 얘기가 길어졌지? 내가 늘 그래. 대신 긴 설교를 요약해 줄게. (선생님답지?)

일. 나태를 즐기지 마. 은근히 즐기고 있다면 대신 힘들다고 말하지 마.

이. 몸을 움직여. 운동하고, 사람을 만나고, 할 일을 해. 술 먹지 말고, 일찍 자.

삼. 그것이 무엇이든 오늘 해. 지금 하지 않는다면, 그건 네가 아직도 나태를 즐기고 있다는 증거야. 그럴거면 더 이

상 칭얼대지 마.

사. (마지막이야 잘 들어?) 아무리 독한 슬픔과 슬럼프 속에서라도,

여전히 너는 너야. 조금 구겨졌다고 만원이 천원 되겠어? 자학하지 마,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그거 알아? 모든 것은 흘러. 지나고 나면 이번 일도 무덤덤해 질거야. 하지만 말야, 그래도 이번 자네의 슬럼프는 좀

짧아지길 바래.


잘 자.

(아니, 아직 자지 마. 오늘 할 일이 있었잖아?)

2005. 2.

서울대 김난도 교수님이 제자에게 보내는 메일의 내용 이라고 한다.

이 글에서, 목표가 흐려져서 그런게 아니냐는 말이 가장 마음에 와닫는다.

어찌보면 대학원을 들어오면서 생각했던 목표의 종착점에 와 있는 것인데,

어느새 종착점이 새로운 시작점이 된 시점이 되어버렸다.

목표가 흐려져서, 보이지 않아서 나태한 것일지도..

아니..실상은 게으름을 즐겨서 그런게 아닐까...

좀 더 부지런해져보자..

by BSang 2012. 3. 1. 15:01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에 실린 풍자만화..-_-;;

이거보고 뒤집어졌다 ㅎㅎ

 



뉴스에 나오는 내용을 보니까

신발을 던진 그 기자는 이라크의 영웅이 되었던데..

이라크사람들이 장대에 신발을 꽃아놓고 시위를 하는 모습도 나왔고,

부시에게 던진 신발을 1000만달러에 사려고 하는 사람도 나왔다고 한다.

그 기자의 조카인가가 나와서 우리 삼촌을 풀어달라 고 얘기하는 모습도 나왔구..

그나저나 부시대통령...잘 피하던데..ㅎ 

by BSang 2012. 3. 1. 15:01

한동안 드라마류는 거의 안 보다가,

갑자기 보게 된 베토벤바이러스..

처음엔 컴터 바이러스 이름 중에 그런게 있나 했는데,

그런 제목을 가진 음악이 있다고 한다.

인터넷에 보니까 나처럼 그렇게 생각한 사람은 없는것 같고,

예전에 유행하던 펌프에서 나온 음악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는거 같음..-_-;;

한편 정도 보고나서 완전히 빠져서, 지난회들을 다 모아서 한번에 시청..

처음엔 노다메칸타빌레를 베낀 드라마이겠거니 생각하고,

어느정도나 거기서 벗어나려나 하고 생각한 게 사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음악드라마가 제대로 만들어질 역량이 되는지에 대한 의문도 있었구.

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사람처럼 어색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치만 회가 갈수록 흥미진진해지고, 재미있어져서 나온 것까지 전부한번에 봤다.

특히 드라마의 중심에 있는 강마에, 김명민의 연기...후덜덜할 정도..

김명민 이란 배우는 하얀거탑 에서 본게 처음이었는데,

거기서도 너무 역할을 잘해서, 상대배우가 너무 드러나 보이지 않을정도였으니..

게다가 이런 드라마가 나올 정도의 역량이 된다는게 놀랍다.

지겹도록 나오는 신데렐라식의 스토리, 혹은 출생의 비밀, 혹은 사랑얘기들..

일단 이 드라마는 그런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높은 점수를 주고싶다.

물론 약간의 러브라인이 회가 가면서 나오긴 했지만, 뭐 그래도 그정도쯤이면..

연장 같은거 하지말고, 원래 스토리대로 끝을 볼수 있었음 좋겠다. 

by BSang 2012. 3. 1. 15:00

주말동안 오랫만에 집에 박혀서,

받아놓은 만화책을 감상..

제목이 "개 고양이 점프" 라고 되어있어서 그동안 흥미도 가지지 않다가

어떤 내용인지 확인하자 고 열어보면서,

단숨에 다 읽었다.,

이 만화의 장르는,

"우주와 육상을 테마로 한 장대한 러브 코미디" 라고 나온다. -_-;

시작되는 부분을 어떤 남자앞에 이쁜 여자가 나타나는 일반 연애물처럼 시작되는데,

고등학교와 대학교가 나오는 학원물이기도 하고,

육상을 소재로 한 스포츠물이기도 하고,

우주가 나오는 SF물...이건 아니군..

어쨌든

"그것은 작은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엄청난 스피드로 달려서,

엄청난 점프를 하면,

나는 저 멀리

저 멀리까지 날아가서

스페이스 셔틀처럼

지구를 돌 수 있어!"

이 만화를 보면서 느껴졌던 감정은 복잡미묘했다.
 

1. 내가 지금의 전공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저 만화책의 말처럼 지금도 저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천체역학이든, 우주동역학이든 암튼 그런걸 배워서 그런지

저 그림을 보고서 저 그림처럼 생각할수가 없었다.

바로 떠오르는 건

초속 7.9 킬로로 달려서 점프를 하게 된다면,

지구를 빙글빙글 돌수 있다 라는 답이 딱 나왔으니까..

그것보다 빨리 달려서 점프를 하면 지구의 중력에 의해서 타원운동을 하게 될테고,

초속 14킬로를 넘어서면 지구와는 영영 안녕 하게 된다는 사실까지..

만화책의 느낌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가 너무 메마른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ㅜㅜ





2. 만화속의 천문부..

만화속에서 친한(친한지는 모르겠지만)선배가 천문부 가입을 권유한다.

천문부에 가본 주인공은 선배와 다른 사람들이 벌린 술판을 본다 -_-;;

옆에서는 열심히 관측하는 사람도 있구..

사실 내가 입학했을 때만 하더라도 선배들이나 동기들 모두 술을 엄청 마셔댔던걸로 기억한다.

난 술을 거의 입에 대지도 못했지만 그런 모습들을 많이 봐 왔으니까..

실제 산에서 관측하는 사람들도 술을 많이 먹는다는 얘기도 들었구.

지금은 세대가 바뀌어서 그런지 술을 권하는 사람도, 먹는 사람도 별로 없는듯..

나 역시 입학초기에 야간수업을 들어가야 했을 때

학교 잔디밭에서 권하는 술을 먹고서, 얼굴이 뻘개진 상태로 수업에 들어가서 수업을 들은 기억이 있다 -_-;;




3. 여러가지 하늘에 대한 콘티들..

허블우주망원경,

안드로메다 은하,

우리은하,

그리고 하와이의 마우나 키 산에 있는 거대망원경들..

이러한 것들이 만화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다른 만화와는 다른 특별한 느낌을 주게 만든다.

나한테는 그러한 만화책에서와 같은 느낌이 없는거 같아서, 이쪽일을 하면서도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어쩌면 아마추어와, 프로가 되려는 사람의 차이일지도..

지나친 연애물의 형태를 따르지 않고,

약간은 아즈망가 대왕 같은 분위기도 풍기고,

그리고 무엇보다 팬티 가 많이 나오는 만화 -_-;;

보면서 스포츠물이겠구나 싶어서 주인공이 본격적으로 멀리뛰기 하는 장면이 언제 나오나 했는데,

결국 육상부로 돌아가는 내용은 없다.

만화가 풍기는 분위기가 넘 좋다.




by BSang 2012. 3. 1. 14:59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불경 "숫타니파타"중에서)

서로 사귄 사람에게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긴다.

사랑과 그리움에는 괴로움이 따르는 법

연정에서 근심 걱정이 생기는 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숲속에서 묶여있지 않은 사슴이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다니듯이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욕망은 실로 그 빛깔이 곱고 감미로우며

우리를 즐겁게 한다.

그러나 한편 여러가지 모양으로

우리의 마음을 산산이 흐트려 놓은다.

욕망의 대상에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서로 다투는 철학적 견해를 초월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도달하여

도를 얻는 사람은

"나는 지혜를 얻었으니 이제는 남의 지도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알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탐내지 말고, 속이지 말며,

갈망하지 말고,남의 덕을 가리지 말고,

혼탁과 미혹을 버리고

세상의 온갖 애착에서 벗어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세상의 유희나 오락

혹은 쾌락에 젖지 말고

관심도 가지지 말어라

꾸밈없이 진실을 말하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물속의 고기가 그물을 찢듯이

한번 불타버린 곳에는

다시 불이 붙지 않듯이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어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마음속 다섯가지

덮게를 벗기고

온갖 번뇌를 제거하며

의지하지 않으며

애욕의 허물을 끊어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최고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 정진하고

마음의 안일을 물리치고

수행에 게으르지 말며

용맹정진하여 몸의 힘과 지혜의 힘을 갖추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애착을 없애는 일에 게으르지 말며

벙어리도 되지 말라.

학문을 닦고 마음을 안정시켜

이치를 분명히 알며 자제하고 노력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빨이 억세고 뭇짐승의 왕인 사자가

다른 짐승을 제압하듯이

궁벽한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자비와 고요와 동정과 해탈과 기쁨을

적당한 때에 따라 익히고

모든 세상을 저버림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탐욕과 혐오와 헤맴을 버리고

속박을 끊어 목숨을 잃어도 두려워 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흑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것의 뜻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의미는 부처님이 열반하시기 전 최후의 유훈인 “제행이 무상하니,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와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불교는 "모든 것은 변한다.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 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으름 없이 열심이 묵묵히 부단히 홀로 정진하라는 의미입니다.

*"<숫타니파타>는 가장 오래된 불교경전입니다. 아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하나의 경전으로 체계화되기 그 이전의 거의 원형에 가까운 부처님의 육성입니다. 그러므로 이 <숫타니파타>에는 난해한 불교전문용어나 철학적인 딱딱한 개념이 전혀 없습니다. 그 대신 때로는 지루하기조차 할 정도로 순박한 글귀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반복 글귀를 통해서 우리는 저 맑고 청정한 새벽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추위(인도의 겨울밤은 상상외로 춥다고 합니다)를 가릴 옷 한 벌과 밥그릇(바리때) 한 개만을 든 채 길에서 살다가 길에서 사라져간 이, 그가 바로 저 영원한 구도자의 상징인 부처님입니다. 그는 무우수 나무 밑에서 태어나 보리수나무 밑에서 깨달음을 얻은 다음 그 깨달은 바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하여 45년간을 바람처럼 살다가 그의 나이 80세에 사라수 나무 밑에서 조용히 열반(임종)에 들었습니다. 그런 그의 가르침이, 아니,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살다가 길에서 사라진 이의 말이 뒷사람들에 의해서 하나의 묶음으로 모아졌으니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말씀 모음집인 <숫타니파타>인 것입니다."
불교는 '부처님'에 대한 인간의 시각이 얼마나 좁은 것이었는가 느끼게 합니다.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유용한 말들이 가득합니다. 굳이 이 글에서의 부처님 말씀처럼 집착을 버리고 무소유와 무욕을 실천함으로서 '니르바나(해탈)'에 이른다는 것이 어려울지는 몰라도 돈과 명예, 욕심과 허영으로 가득 찬 세상을 좀더 현명하고 즐겁게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빌렸고,
무엇을 되돌려줬는지
나는 어떻게 살았고, 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한번쯤 되돌아보게 합니다.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퍼온글..
문득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라는 말이 생각나서 찾아봤는데,
저런 구절들이 있는지는 몰랐다.
자주 읽어봐야지..
by BSang 2012. 3. 1. 14:55

100만년 동안이나 죽지 않은 고양이가 있었습니다. 
100만번이나 죽고서도 100만번이나 다시 살아났던 것입니다. 
멋진 호랑이 같은 얼룩고양이였습니다. 
1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 고양이를 사랑하고, 
1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 고양이가 죽었을 때 울었습니다. 
고양이는 한 번도 울지 않았습니다. 


한때, 그 고양이는 임금님의 고양이였습니다.
하지만 고양이는 임금님이 싫었습니다. 
임금님은 그 고양이를 멋진 상자에 넣어 
전쟁에 데리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어느날, 고양이는 날아온 화살에 맞아 죽어 버렸습니다. 
임금님은 한창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 고양이를 안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왕궁의 뜰에 고양이를 묻었습니다. 



어떤때는 뱃사람의 고양이가 된 때도 있었습니다. 
고양이는 바다가 싫었습니다.
뱃사람은 세계 곳곳의 바다나 항구에 고양이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어느날, 고양이는 배에서 떨어져 버렸습니다. 
뱃사람은 물에 젖은 걸레처럼 축 늘어져 버린 
고양이를 안고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그리고, 먼 항구 마을의 공원 나무 밑에 고양이를 묻었습니다



어떤때는 서커스의 요술쟁이의 고양이가 된 때도 있었습니다.
고양이는 서커스 따위는 싫었습니다.
요술쟁이는 매일 고양이를 상자 안에 넣고서는 톱으로 두동강을 내었습니다.
그리고는 살아남은 고양이를 상자에서 꺼내 보여 주면서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어느 날 요술쟁이가 실수로 고양이를 진짜로 두동강이를 내버렸습니다.
요술쟁이는 두동강이가 되어 버린 고양이를
두 손으로 쳐들고는 큰소리로 울었습니다.
하지만 고양이는 죽는것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어떤때 그 고양이는 도둑의 고양이가 된 때도 있었습니다.
고양이는 도둑이 몹시 싫었습니다.
도둑은 개가 있는 집만 찾아서 도둑질을 하러 들어갔습니다.
어느날, 개가 고양이를 물어 뜯어 죽여 버렸습니다.
도둑은 훔친 다이아몬드와 함께 고양이를 안고서
큰소리로 울면서 어둠 속의 마을을 걸어다녔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작은 뜰에 고양이를 묻었습니다.  



어떤때 고양이는 혼자 사는 할머니의 고양이가 되기도 했습니다. 
고양이는 할머니가 몹시 싫었습니다. 
할머니는 매일 고양이를 안고 작은 창문 너머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고양이는 나이가 들어 죽어버렸습니다.
늙어서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할머니는
늙어서 죽은 고양이를 안고 하루 종일 울었습니다. 
할머니는 뜰의 나무 밑에 고양이를 묻었습니다. 


어떤때 고양이는 어린 여자 아이의 고양이가 되기도 했습니다.
고양이는 여자 아이가 매우 싫었습니다.
여자 아이는 고양이를 업어 주기도 하고,꼭 껴안고 자기도 했습니다.
어느날, 고양이는 여자 아이의 등에 업혀 묶은 띠가 목에 감겨 죽었습니다.
머리가 흔들거리는 고양이를 안고서, 여자 아이는 하루 종일 울었습니다.
고양이는 죽는 것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어떤때, 그 고양이는 어느 누구의 고양이도 아닌 것이 되었습니다.
도둑 고양이였던 것입니다.
고양이는 자신이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비로소 자기 자신의 고양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암고양이이건 그 고양이의 짝이 되고 싶어했습니다. 
커다란 물고기를 선물로 바치는 고양이도 있었습니다.
살이 통통하게 찐 쥐를 갖다 바치는 고양이도 있었습니다. 
멋진 호랑이 무늬의 털을 핥아 주는 고양이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양이는 그런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습니다. 
"난, 100만 번이나 죽었었다구. 이제 와서 뭐 새삼스럽게 그래.나 원 참!" 
고양이는,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좋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딱 한 마리, 그 고양이를 거들떠 보지도 않는
눈부시게 희고도 아름다운 털을 가진 고양이가 있었습니다.
고양이는 흰 털을 가지 고양이 옆으로 가서,
"난, 100만 번이나 죽었었단 말이야!" 라고 말했습니다.
흰털 고양이는,"그럴 수도 있지."하며 시큰둥하게 말했습니다.
"넌 아직 한 번도 죽어본 적이 없지?"라고 물었습니다.
흰털 고양이는 그저 "그렇단다." 라고만 말할 뿐이었습니다.
고양이는 좀 화가 났습니다.
고양이는 자기 자신이 무척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고양이는 흰 털을 가진 고양이 앞에서
빙그르르 세 번이나 돌면서 말했습니다.
"난, 서커스의 요술쟁이의 고양이일 때도 있었어."
흰 털을 가진 고양이는 "그래" 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나는, 100만 번이나...." 하고 말을 잇다가
"네 옆에 있어도 돼?" 라고 흰털 고양이에게 물었습니다.
흰털 고양이는 "그렇게 하렴." 하고 가볍게 대답했습니다. 



흰털 고양이는 귀여운 아기 고양이를 많이 낳았습니다.
고양이는 흰 털 고양이 옆에서만 지냈습니다.
고양이는 더 이상 "난, 100만 번이나...." 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고양이는 흰 털 고양이와 많은 아기 고양이를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이윽고 아기 고양이는 점점 자라나 뿔뿔이 어딘가로 가 버렸습니다. 
"저 놈들도 멋진 도둑 고양이가 되었구먼." "정말 그렇군요." 
흰털 고양이가 그렁그렁 부드럽게 목소리를 내며 대답했습니다. 
흰털 고양이는 차츰 늙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한층 더 부드럽게 "그렁그렁" 목을 울리곤 했습니다. 
고양이는 흰털 고양이와 함께 언제까지나 살아있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날, 흰 털 고양이는 그 고양이의 옆에서 
조용히 움직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고양이는 처음으로 울었습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지나고, 또 밤이 오고, 아침이 오고.. 
고양이는 100만번이나 울었습니다. 
그리고 밤이 지나고 아침이 지난 어느 날 한낮에,
고양이는 울음을 그쳤습니다. 
고양이는 흰 털 고양이 옆에서 조용히 움직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카우보이 비밥에서 잠시 언급되었던 "백만번 산 고양이"관한 내용입니다

원본출처 : 사노요코 글 그림-백만번 산 고양이




오늘의 교훈
1> 솔로영생 커플단명
2> 백만년전 태고적에 고양이가 있었다


내가 자주 가는 곳에서 퍼온글.

카우보이 비밥에서 이런 얘기가 있었던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일본애니를 첨 보기 시작했을때의 애니였는데..

다만 줄리아가 이뻤다는 건 기억난다.. -_-;;

리플 달린걸 보니까 오늘의 교훈 1번이 사람들에게 감명을 많이 줬나부다. 글이 많이 달렸다..ㅎㅎ


by BSang 2012. 3. 1. 14:52














최근에 삘 받아서 본 일본드라마..

호타루는 일본말로 반딧불을 얘기하는데, 반딧불의 빛 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드라마 속의 여주인공의 이름이 호타루 이기 때문에 호타루의 빛 이라고도 할수 있을듯..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하루카 아야세일줄은..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에서 나오던 풋풋한 여고생의 이미지만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드라마에선 캐리어우먼으로 나온다.

그리고 호타루와 같이 사는 부장...

그런스타일의 남자..정말 멋있는듯..

건어물녀, 거북이녀, 타이어녀, 아호미야(아호는 바보라는 뜻) 등으로 불리는 여주인공과,

그 여주인공과 같이 살게 되면서 여주인공을 변화시키는 남주인공..

침대에서 자는 장면에서조차도 화장을 하고 있다는 그런 드라마들보다는

실제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 드라마가 훨씬 낫다.

이것도 순정만화로 나와있는듯..

나중에 기회되면 읽어봐야지..

by BSang 2012. 3. 1. 14:42



올해들어서 노다메 칸타빌레 이후로 두번째로 보는 일본 드라마.

모 클럽에 올라왔었는데, 댓글이 가장 많이 달렸길래 재밌겠다 싶어서 받았다가,

일요일부터 보게 됐다.

일본의 경제성장기인 60년대를 그리고 있는 드라마.

너무나 눈에 익은 배우들이 많이 나와서, 대단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먼저 본 선배 말로는 정말 쟁쟁한 배우진이라고 하던데..)

사토라레에 나오던 여군의사를 맡았던 스즈키 교카가 은행장의 정부로 나올 줄이야.. ㅡㅡ;;

키무라 타쿠야는 long vacation 이후로 두번째로 보는 거여서 그때 봤던 앳된 얼굴과 매치가 잘 안됐고,

로스트 메모리즈에 나오던 나카무라 토오루가 사위로,

춤추는 대수사선에서 수사를 지휘하던 야마기바 토시로는 다른 은행의 은행장으로..

그 외에도 눈에 익은 배우들이 많이 보인다.

상당히 진지하면서도 더럽게 꼬인, 겉으로 보기엔 화려하지만 속은 썩어버린 가족들..

선배는 잼있어서 단숨에 다 봤다던데, 나 역시 지금 7편을 보고 있는중..

키무라 타쿠야가 상당히 바른 생활 맨으로 나온다. 긍정적인 생활방식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일을 추진하는 역할..

정략결혼, 근친상간, 은행을 위해 아들을 짓밟는 아버지 등등..

이 작품 역시 하얀거탑을 쓴 작가가 쓴 거라고 한다.

이 작품은 국내에 리바이벌이 안 되려나..

by BSang 2012. 3. 1. 14:40




파인만은..

물리학자인 리차드 파인만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수학과 물리라고 하는 것은

신이 하고 있는 체스를 옆에서 지켜 보며

거기에 어떤 룰이 있는지

어떤 아름다운 법칙이 있는지

알아내려 하는 것이다라고

처음부터

그런 법칙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부 엉터리이고

의미없는 일들의 끊임없는 반복일 뿐이라고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수학자들은

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재미없는 우주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로

싫증이 나버리고 말겁니다

하지만 오까모토는

체스의 수수께끼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유리씨같은 사람과 만날 수 있었다

어쩌면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도

그 룰 위에 놓여져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런 어떠한 룰이 없었다면

두사람이 어디선가 만나더라도

그대로 스쳐 지나가서

서로 상관할 일도

말을 주고받을 일도 없을 터인데

우주 한 귀퉁이인

이 연회장에서

우리들이 이렇게 모이게 된 것도

그리고 오늘

우리들이 이렇게 행복한 것도

오까모토가 단 한사람의 여성과 만나 준 덕택입니다

운명이라고 하는

가장 어려운 수수께끼를 오늘

그가 풀어 낸 듯한 느낌이 듭니다

선배한테 빌려준 시디를 받아서, 디비디로 구우려고 하드로 저장해 놓던 중,

이 내용을 찾으려고 재생했다가, 결국 끝까지 다 봐 버렸다. ㅜㅜ

드라마의 흡입력이 대단한것 같다. 처음 봤던게 2000년 경이었던걸로 기억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요조숙녀라는 드라마로 리베이크했다고 들었는데, 사쿠라코의 역할을 김희선이,

오스케의 역할을 고수가 했다고 들었었다. 고수는 하필 그 많은 연구 중에서 천문학을 전공한 사람으로 나왔다던데..

생각만큼 흥행은 되지 않았던듯..

저 대사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런 우주에서의 룰이, 사람에게도, 아니 나에게도 있을지..^^;;

처음 볼 때 너무 인상적으로 봤었는데, 그 느낌이 여전하다.

이러다가, 고쿠센이나 섬머스노우 까지 다 봐버리는건 아닌지..ㅜㅜ

다시보면서 느낀거지만..마츠시마 나나코..정말 이쁘다..ㅎㅎ

by BSang 2012. 3. 1. 14:39

자네의 글을 읽고 며칠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네. 내가 오랫동안

교수로서 해왔던 고민을 다시 한번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에 대해 아주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마찬가지로 처음으로

내가 하는 고민을 학생들에게 고백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아

다행스러운 면도 있는 것 같고.

돌이켜 보면, 벌써 "교수"를 직업으로 가진지가 벌써 15년이 다

되어가고 있군. 시립대에 온 지가 벌써 7년째이고, 시립대에 오기

전에 미국에서 교수를 한 것도 8년이고. 거기에 미국에서 강사를

한 2년을 더하면 거의 2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기도 하네. 미국에서는 주로 MBA나

학부 4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경영전략이나 국제경영학 과목을

가르쳤지. 대개 내 수업은 학생들이 졸업하는 학기에 경영학을

총정리하는 기회로 듣는 과목이었고.

처음에 한국에서 학생을 가르친 것이 95년이니까, 지금 03학번이

국민학생이었을 때인가? 미국Georgia State University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중앙대학교에 교환교수로 나왔을 때지. 물론 그 때는

일년동안 경영학원론 한 과목하고 대학원 한 과목만 하는 아주

부담없는 경험이었지만 말이야. 그 때 내가 했던 과목이 95학번

신입생을 대상으로 경영학원론 원강이라는 것이었는데, 영어로

진행하는 수업이었어. 벌써 8년전에 중앙대학교에서는 모든

수업을 영어로 진행하는 과목이 개설되어 있었다는 말이지.

잘 알겠지만 이미 많은 대학에서, 특히 경영학과에서는 전체 과목의

2-30%가 영강으로 진행되고 있다잖아?

그리고 나서 다시 미국에 돌아갔다가 시립대로 부임한 것이 97년이네.

97년에 처음 본격적으로 한국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을 때, 나는 당연히 미국에서 가르치던 방식과 수업양을 그대로

사용했지. 그런데 미국에서 쓰던 수업계획서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너무나 다른 현실에 직면하게 된 거야. 학생들이 도저히 따라오질

못하는 거지. 결국 미국에서 하던 양의 반이 아니라, 반의 반도 못하게

되더라고.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다네. 아 이 친구들이 과연 어쩌자고

이러고 있을까. 세상은 너무도 빨리 변하고 있고, 글로벌 시대가

(그 때 당시로 보면) 이미 코 앞에 닥쳐와 있는데 이렇게 준비해서

될까라는 걱정이 정말 많이 들더군.

그때부터 7년이 흐른 지금에야 겨우 미국에서 내가 하던 양을 거의

같은 수준으로 올릴 수 있었다네. 자네가 들은 그 수업 말이야.

얼마나 숙제가 많고, 준비할 게 많아 부담이 된다는 수업이라고들

불만이 많은가. 미국의 일반적인 대학생은 한 학기에 4-5과목을 듣는데,

거의 모든 수업이 내 수업정도의 강도를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네.

그런 수업을 4년 동안 들은 미국의 대학졸업생과 한국, 특히 우리

시립대의 학생들의 경쟁력을 비교해 본다면 아주 두려운 생각이

들지 않는가? 왜 미국의 대학이 세계 최고라고 평가받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게. 97년만해도 미국의 대학생은 미국에서, 한국의 대학생은

한국에서 경쟁한다는 생각도 할 수 있었겠지만, IT의 발달은 이미

그런 생각을 과거의 유물같이 만들어 버렸다네.

기업이 가지고 있는 여러 조직이나 기능을 한국이나 미국이나

홍콩이나 싱가폴 같은 특정?? 지역에 꼭 유지해야 할 이유가 없어져

버린 것이지. 예를 들어, 한국지사의 인사기능을 이제는 꼭 한국에

둘 필요가 없어져 버렸다는 거야. 한국, 일본, 호주, 홍콩, 싱가폴 등

모든 아시아 지역 지사의 인사기능을 한 곳에 집중함으로써 효율성을

향상할 수 있게 된다면, 어디로 집중해야 할까? 한국? 호주?

그 의사결정을 내리는 핵심결정요인은 바로 호주나 일본, 호주,

홍콩 등의 인사담당자와 비교한 한국 인사담당자의 경쟁력이라는

것이지. 경쟁이 글로벌화되고 있다라는 것은 제품시장의 경쟁만을

말하는 건 아니야. 앞으로 몇 년만 지나면 이런 사실은 너무도

명백해지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한국의 대학생은 결국 미국이나

홍콩이나 싱가폴의 대학생과 경쟁할 수 밖에 없게 되어 버리겠지

(물론 이미 그렇게 되어 버렸지만, 아직은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만).

이제는 개인이 국가를 선택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버렸다네. 얼마

전에 무라까미 류의 소설을 읽다가 충격을 받았지. 그 사람이 “일본은

필연적으로 망할 것이다. 일본이 ?÷? 필요로 하는 것은 글로벌화되어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춘 인재인데, 이런 인재들은 지금 일본을 떠나고

있다”라는 글을 썼더군. 이 문장에서 “일본”이라는 단어를 “한국”으로

바꾸면,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지.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춘

인재들은 이제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에 사는 것이

아니야. 그 사람들은 한국에서 사는 것이 지금 가장 유리하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것일 뿐이지. 다른 좋은 기회가 생기면 언제든지 떠날

수도 있고. 바로 그런 이유로 그런 인재들이 한국에 있는 것을

유리하다고 생각하게끔 유도하는 정부정책이 나와야 하는 것이고,

한국이라는 국가의 국가경쟁력에 대해 연구기관들이 고민하고 있는

것이지. 지금 학생들은 이렇게 무서울 정도로 바뀌는 환경에서

생존해나갈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춰야만 하는 거야.

미국에서 학생을 가르칠 때는 상당히 인기가 있는 교수였고,

수업평가를 하면 2-30명의 학생으로부터 5점 만점에 5점을(그러니까 모든 학생이 모든 평가항목에서 5점을 주었다는 거지) 받는 경우도 종종

있었던 내가 왜 시립대에서는 자네 말처럼 “경영학부 학우들에게

인심을 잃은” “모든 학생들이 비추라고 말하는” 그런 교수가 되었을까?

물론 한국과 미국 사이의 문화적인 문제도 있을 수 있겠고, 내

개인적인 스타일의 문제도 있을 수 있겠지. 나처럼 소리치고 야단치고

“갈구는” 교수님들은 별로 안 계실 테니까 말이야.

수업시간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다만, 나는 아주 초조하다네. 교수로서

나의 고객은 “사회”이고 “기업”이다라는 말은 한 적이 있지? 나의

임무는, 그리고 나의 “존재의 이유(Raison d’tre)”는 나의 “제품”인

우리학교 학생들을 나의 고객인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로 양성해서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네. 그런데 우리 학생들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로 빨리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은 나를

아주 괴롭게 만들고 있지.

사회가 원하는 인재, 혹은 기업이 원하는 인재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청년실업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구직자는 직장을

찾아 헤메고 있는 동안, 기업에서는 사람이 없어서 사람을 찾아

헤메고 있다는 이야기는 언론을 통해서 잘 알고 있지?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아직도 우리 학생들이 이런 환경변화를 제대로 못 느끼고

있는 것 같아.

얼마 전에 우리 학교 취업비율이 어떻게 집계되고 있는지를 알고 너무

놀랐다네. 아무도 정확히 집계할 수 없기 때문에, 작년보다 약간

높은 수치로 그냥 보고한다는 거야. 우리 학교 학생들의 많은

수가 사회에서 인정받을 만큼 충분한 경쟁우위를 갖추지 못한 채

졸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고, 신입생들은 그런 선배들의 모습은 정확히

보지 못한 채, 선배들을 당연한 모델로 여기고 그 모습을 따라가고

있는 것 같다는 게 내 느낌이지.

우리 학교 졸업반 학생들하고 이야기하면 너무도 답답한 게 많다네.

세월이 가고 세상이 바뀌었다면 뭔가 달라질 법도 한데, 많은 학생들이

여전히 「어제의 방식」대로, 「우리의 방식」대로 살기를 고집하고

있다는 느낌이야. TOEIC 몇점이 필요하고, 학점은 어떻고 라는 식의

과거의 모델에 집착하고 있는 거지. 그게 안되면 “눈높이를 낮춰서

중소기업으로” 아니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자격증으로”라는

식으로 말이야.

기업이 원하는 인재는 단순한 TOEIC점수가 아닌 진짜 영어실력이고,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밝히고 남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력이고

발표력이고, 경력사원 정도로 준비가 되어 있는 신입사원이지. 결국

남이 지시하는 업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피동형 인간이 아니라,

스스로 새로운 문제를 파악하고 그 해결책을 능동적으로 찾아내고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재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지. 그러니까 현대자동차에 내는 원서와 면접요령하고

삼성전자에 내는 원서와 면접요령은 전혀 다를 수 밖에 없는 거야.

4학년 때 똑 같은 원서에 똑 같은 자기소개서를 여기저기 내고

“성실히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방식으로는 절대로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없는 세상이 이미 되어 버렸다네. 그러니까 이미 3학년때면

영어나 논리력 같은 기초는 튼튼히 갖추고 자신이 원하는 경력에

특화되는 방향으로 준비를 해야 한다는 거야.

이런 것을 국제경영?隙犬? 경영전략이나 경영사례연구 같은 과목을

듣는 3-4학년 학생들에게 말해주면서 느낀 점이 무엇인 것 같은가?

미치도록 답답하지만 “이미 늦었구나”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네.

내가 경영학원론을 맡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야.

1학년 때부터 내가 가르치는 방식으로 공부를 한다면 3-4학년이 되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가지고 말이지. 물론 몇 년전에도

한번 시도했다가 학생들을 끌고 가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포기를 한

적도 있다네. 그렇지만 이번에는 다른 교수님들도 많이 도와주시고

동감해주시기 때문에 계속해 볼 생각이긴 하지.

내가 강조하는 것이 몇가지가 있지? 바로 그것 때문에 숙제가 많다라는

생각들을 하는 것 같지만 말이야. 먼저 글로벌화된 인재를 양성한다는

의미에서 원서 교과서와 Critique를 요구하는 것이야. 우리 시립대

학생들이 일반적으로 가장 큰 약점으로 가지고 있는 점이 바로

영어거든. 미국이나 홍콩, 싱가폴, 호주를 제외하고라도 서울의 많은

대학의 학생들이 이미 2-30%의 과목을 영어로 듣고 있는데, 우리 학교

학생들은 아직도 영어에 대해 막연히 “해야지”라는 생각만 하고

있다가 나중에는 겨우 TOEIC이나 하자라는 식이 되어버리잖아?

TOEIC이란 이제는 그야말로 최소한의 요구조건이지,

TOEIC점수가 높다는 것만으로 기업이 “아 영어 잘하는구나”라고 인정해주는 시대는 이미 지나가 버렸는데 말이야.

이런 말을 하면 우리 학교 학생들은 “최소한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니냐”

라는 생각을 하지? 그런데 이제는 “최소한”이란 아무 의미가 없지.

워낙에 많은 경쟁자들이 있으니까, 분명한 경쟁우위가 있어야 한다는

거야. 기업 인사담당자들 역시 시립대학생은 영어를 못할 것이다라는

인식을 하고 있을 거야. 그런데 “아 이 친구는 TOEIC이 무척 높네? 아

영어를 잘 하겠군”이라고 호의적으로 보기 보다는 “아 이 친구는 역시 TOEIC점수만 높지, 영어는 잘 못하는 군”이라는 식으로 생각할 확

률이 높아 보인다네.

자 그렇다면 영어는 어떻게 공부해야 할까? TOEIC은 한 1년 정도

집중해서 투자하면 결과가 나올 수 있지만, 영어실력은 1-2년 가지고

대폭 늘지는 않는 것 같은데 말이야. 내 경험에 의하면 영어회화에서

“I am, you are, he is”같은 “Be” 동사를 제대로 활용하는데 까지만 1년이

꼬박 걸렸다네(물론 1년 동안 매일 두시간 이상 영어에 투자했는데도

말이야). 1학년 때부터 시작해서 꾸준히 해야 졸업할 때 그래도

어느 정도 영어실력을 갖출 수 있게 된다는 것이지. 자 이제 영어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하는 세상에서 영어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정답은 “무식하게, 꾸준히, 일찍부터”라는 거지. 다른 학교

학생들은 2-30%씩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말이야.

물론 어렵지.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네. 하지만 세상은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네. “나는 원래 영어를 잘 못해요,” “지금까지 발표식

수업을 받은 적이 없어서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려요,” “나는 집이 좀

여유가 없어서 많은 경험을 하지 못했어요”라는 이야기를 하면, 사회는

“그러냐. 참 안됐구나”라고 위로를 해 줄지는 몰라도 그런 부분을

감안해서 가산점을 주지는 않는다네. 불??한 위치에 있는 만큼 더욱

노력해야 할 뿐이지. 세상은 절대로 공평하지 않다네.


자 그렇다면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요구해야 할까?

어차피 4년이라는 시간은 어느 학교 학생에게나 똑같이 주어져있는데,

그 4년을 어떻게 보내도록 유도해야 할까? 갓난 아이처럼 애지중지

보살펴서 키우는 것이 참 좋아보이기는 한데, 그렇게 해주면 4년 안에

이 험난한 세상을 혼자 힘으로 헤쳐나갈 수 있는 역량을 갖추기

힘들어 보이는데 말이야.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기 호랑이

방식이 지금 우리 상황에서는 옳은 것 같다네. 살아 남는 일부는

틀림없이 4년 후에는 상당한 역량을 갖출 만큼 준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지. 안타깝게도 포기하고 벼랑에서 떨어져버리는

아기 호랑이가 너무 많은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야.

Essay나 Book Report같은 숙제가 기대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학생들의

표현력과 논리력의 향상이지. 지난 몇 년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전통적으로 글을 통한 Communication보다는 얼굴을 맞대는

말을 통한 Communication을 선호해왔지만)에서도 Written Communication이

빠른 속도로 강조되어 가고 있지. E-Mail의 영향도 크지만, 이제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협의를 진행하지 못하고 점차 개인의 책임이

강조되어가면서, “근거”나 “증거”로 남길 수 있는 글을 선호하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한국의 기업에서도 이제는

“Powerpoint”나 “Word”같은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글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야 하는 상황이 정말 놀라울 정도로 대폭 늘어났다네.

그렇다면 글을 통해 남에게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밝히고, 남을

설득할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하는 것은 필수적인 조건이라네. 여기서

중요한 건 표현력과 논리력이지. 어떤 사항이 왜 문제이고(많은

경우에 문제로 지적되면 그 문제를 만들거나 간과한 사람이나

조직은 무척이나 싫어하기 때문에 그게 문제인지를 납득시키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경우도 많아), 그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향은 무엇이고,

왜 그 방향이 옳은 것인지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하는 거야.

이것이 바로 “창의력”의 문제잖아? 새로운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창의력”을 갖추는 것 역시 무척이나 사회에서

요구하는 역량이지. 이런 창의력을 키우는 것은 “경험”과

“논리력”이야. 많은 문제를 스스로 생각해서 풀어보는 “경험”을

해보고 이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해 보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의 해결책에 대해 누군가가 비판을 해 주는 것; 이런 능력을

학원에서 혹은 교과서로 주입식으로 배울 수는 없거든.

그야말로 1:1 방식으로 “도제”와 같은 방법으로 전수될 수 밖에

없다는 거야. 마치 자전거타는 법을 배우는 것처럼.

논리력이란 어떤 사안을 “당위”가 아닌 “근거”를 가지고 설명하는

것에서 출발하지. 수업시간에도 많이 지적이 되었지만, “나는 이렇게

본다”라거나 “내 생각은 이렇다”라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는 있지만 절대로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는 없지?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역량은 어떻게 갖출 수 있을까? 정답은

“무수한 실패와 실수를 반복하면서도 끊임없이 해 보는 것”이지.

내 생각에는 이미 많?? 학생들이 학기 초와 학기 말의 자신의

글쓰는 역량을 비교해보아도 자신의 실력이 늘었구나라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을 것 같네. 물론 많은 학생들은 이제 수업이

끝났으니 다시 귀찮게 무엇인가를 쓸 것으로는 생각되지는 않지만,

사고의 기본축이 보다 논리적으로 변화하는 계기는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결국 수업의 요구사항들이 다른 수업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많은

것으로 보여질 수 있다라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네. 하지만 숙제의

양을 미국의 대학생과 비교한다면 절대로 많지 않다라고 단언할

수 있다네. 그리고 이 정도를 해내야지 향후 자신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라는 것이 내 소신이기도 하고.

가끔 이런 말을 하는 학생들이 있지. 세상에 영어도 잘하고

글로벌화도 잘 되어 있고, 창의력도 갖추고, 표현력도 좋고,

논리력도 분명하고, 자신의 진로에 대해 분명한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정답은 “매우 적다”라는 거지.

바로 그래서 세상이 “부익부, 빈익빈”으로 바뀌고 있거??. 불과

1-2년 전에 20:80의 법칙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었지? 세상에 20%만이

무엇인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일을 하고, 80%의 사람들은

사회보장의 혜택을 보면서 살게 될 것이다라는 예상 말이야. 물론

100년쯤 후에는 물질적인 부가 확대되어 사회보장의 혜택을 보면서

놀고 먹는 것 자체가 대단히 좋은 수준까지 올라가서

공상과학소설에 나오는 것 같은 사회로 발전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내 느낌으로는 이미 20:80의 시대는 지나고, 10:90정도로 바뀐 것 같지만,

얼마 전에는 더욱 충격적인 글을 읽었다네. 일본의 어떤 사람이 이미

일본은 5:95로 진행하였고, 곧 1:99로 변화될 것이라는 말을 했더군. 내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지금부터 20년 이내에, 그러니까 03학번 학생들이

40대가 되기 전에 한국도 1:99의 사회로 진행된다는 것이지. 나는

그 때 우리 시립대 학생들이 될 수 있으면 많이 1%의 그룹에

속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네.

자 학생들이 내게 가지고 있는 두번째 중요한 불만은 “인격적”인

부분이지? 예를 들어, “시립대는 똥통이다”라는 말에서 드러나는 것

말이야. 내가 그 말을 하는 것 자체는 잘못일 수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하네. 하지만 과연 내가 그 말을 왜 할까? 내가 그 말을 통해서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

먼저 내가 우리 시립대 학생들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그런 말을

하지도 않겠지. 수업시간에 떠들고 소리치고 야단치는 일은 무척

피곤한 일이거든. 그냥 앉아서 발표나 시키고 듣고 있거나, 아니면

칠판 앞에서 학생들이 따라오던 말던 나홀로 진행하면 아주 편하게

살 수도 있잖아?

나는 시립대와 시립대 학생들이 너무 안타까와 보인다네.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중요하지만, 진정한 자부심도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

자신의 치부를 건드리면 깜짝깜짝 놀라면서 신경질적인 대응을 하는

경우가 혹시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느낌을 받지. 우리 시립대의

특성을 몇가지 들어보면 먼저 정말 지나치게 “내부지향적”이라는 게

눈에 띈다네. 전농동 밖의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얼마나

무서운 속도로 바뀌고 있는지 전혀 무시하고 예전의 시립대 방?컥?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도 두렵다네. 물론 그래도

변하고 있지 않느냐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지. 그런데 말이야,

우리가 변화하는 속도가 세상이 바뀌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우리가 변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잖아?

하나의 예를 들어본다면, 지난 학기에 Book Report용으로 제시한 책

중에 “IT와 E-Business”에 관한 책들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아무도

그 책에 대한 글을 쓴 사람은 없었다네. 신문이나 TV에서 수도 없이

나오는 이야기가 향후 IT관련 인력부족현상이 어떻고, IT와

E-Business로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등인데도 말이지. 아주

두려웠다네.

우리 시립대를 연세대나 고려대 같은 학교와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분명히 나타나잖아? 내가 수업시간에도 자주 이야기하지만 “연대나

고대를 한 번 가봐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백양로를 걸어

올라가기만 해도 그 넘치는 플래카드를 통해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연대나 고대가 학교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이것은 결국 학생들의 경쟁력을 높인다는 것하고 똑 같은

이야기지),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지 과연 우리 학생들은 알고

있을까?

자 학교에서 적극적인 지원을 해주는 연대나 고대의 학생들과 우리

시립대 학생들이 밖에 나가서 경쟁을 해야 한단 말이야. 어떻게 해야

하지? “우리 시립대도 연대나 고대만큼 지원하라!!!”라고 데모를

해야 하나? 나는 그건 비현실적인 방법이다라고 보는 거야. 학교가

그렇게 바뀌는 것은 요원하니, 그런 만큼 학생들이 더욱 더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는 거야.

내가 존경하는 인물 중에 아키라 쿠로사와라는 일본의 영화감독이

있다네. 그 사람이 50년대에 만든 작품 중에 “라쇼몽”이라는

흑백영화가 있지. 그 마지막 대사가 “인간은 너무도 약한 존재인 나머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라는 거야. 장애자가 세상의 눈을

회피하고 자신의 방안에만 숨어 있으면서, 자신의 장애를 스스로

감추면서 “이 정도면 괜찮아”라는 것 같다고 비교하면 좀 지나칠까?

세상에 대한 막연한 적개심을 느끼면서 말이야.

우리 학교는 똥통이라네. 학생들에게 충분한 지원을 못해주고 있고,

충분한 자극을 주지도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야. 그런데서 우리

학생들이 “똥통에서 용났네”를 축하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우리 학생들이 “스스로의 약점에 눈을 감아 버리는 장애자”같은

모습을 떨쳐버리고 “나를 믿자” “내가 해내자”라는 도전의식을 갖기를

바란다네. 그 정도로 강력한 자극이 필요할 정도로 문제가 심각해져

있다는 것이 내가 가진 위기의식이기도 하고.

이런 행동이 “인격적인 문제”로 비춰질 수도 있다라는 것을 인정한다네.

마치 “허접한 경제학과”라는 농담이 경제학부 학생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지금 다시 한번 고백하자면 나는 경제학은

경영학부 학생들이 필수적으로 들어야 하는 과목이라고 생각해. 최소한

경제학원론하고 미시경제학은 경영학부 학생들의 필수과목으로

만들어야 한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그래서 “허접한 경제학과”라는

농담에는 경제학부 학생들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고, (이해할 ??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그게 내 방식의 애정표현이라는

것은 밝혀두고 싶어. 마찬가지로 “시립대는 똥통이다”라는 말에 우리

시립대 학생들에 대한 애정과 기대가 담겨있는 내 나름대로의

애정표현방식이라는 것도 말이지.

교수로서 누구나 고민하는 것이지만, 모든 학생들을 만족시키커나

학생들에게 모두 효과적인 방법은 없는 것 같아. 어떤 사람은 도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나하고 싸우면서 커나가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수

있겠지.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래서 경영학원론도 여러

교수/강사가 나눠서 맡고 있는 것 아닐까?

기억나는 여학생이 하나 있어. 첫 발표때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도

발표를 마무리지었던 학생이지. 나중에 내 수업을 통해서 세상을

조금 배웠다라는 인사메일을 받았을 때, 정말 아주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네.

두서 없이 변명을 늘어놓은 것 같아 좀 어색하기도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던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기회였던 것 같구나. 아무쪼록 우리

시립대 학생들이 역량을 갖춰서, 사회에서 훌륭하게 한 몫을 해 낼

수 있는 인재로 발전해 주기를 바라네. 그래야 우리 시립대가

“똥통에서 벗어난 용”으로 바뀔 수 있지 않겠어?

긴 글 읽어줘서 고맙네.

<출처-훌리건 천국..>

서울에 있는 시립대의 교수님이 쓰신 글 같다.

그치만 어떤 분야를 하든 위의 글과 비슷할거라고 생각이 된다.

글에서 교수님이 학생들의 장래를 생각하고, 아끼는 마음이 그대로 묻어나오는것 같다.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중요하지만, 진정한 자부심도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

자신의 치부를 건드리면 깜짝깜짝 놀라면서 신경질적인 대응을 하는

경우가 혹시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느낌을 받지."

특히 이 부분에서, 나 역시 작년에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반성을 하게된다.

이런 생각들을 조금이라도, 우리들에게 보여주신다면...

아무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의사소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다시....힘내자구..

by BSang 2012. 3. 1.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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