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속의 할머니는 항상 숨이 차 하시는 분이다. 조금만 움직이셔도 숨차 하셨고 거의 진통제를 달고 다니시는 분이었었다. 할머니 모습을 어렴풋이 기억하는 사촌동생들에게 물어보면, 그냥 '야야' 할머니 라고 한다. 사촌동생들에게는 항상 아프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시는 걸로 보였던것 같다.

할머니를 처음 만난건 다섯살 때였다. 부산에서 살다가 창원으로 왔던 날이었다. 하얀 옷을 입으시고 비녀를 꽃으신 할머니... 그 때 엄청 울었던 기억이 난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할머니와 항상 티격태격했었다. 티격태격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내가 거의 맞았던것 같다. 그 첫 기억은 무언가 잘못했는데 부지깽이를 던져셔서 관자놀이 부근에 맞아서 피를 흘렸고 나중에 치료해주셨던 일이 기억난다. 다른 애들은 잘못하면 도망가는데, 넌 왜 항상 가만히 있어서 맞냐고, 뭐라 하셨었던것 같다.

할머니는 보수적인 분이셨다. 항상 아침에 일찍 일어나셔서 집 뒤편에 냉수를 떠놓고 빌으셨고, 자주는 아니지만 절에도 다니셨다. 국민학교 때 내 꿈이 뭐냐고 물어보셔서 농부 라고 말했다가 왜 농부냐고, 화를 버럭버럭 내셨었고, 왼손잡이인 내가 숫가락이나 연필을 왼손으로 쓰는걸 이해하질 못하시고 그 습관을 바꿔버리셨다. 국민학교 들어갈 때쯤에 만들어진 내 이름보다는 항상 아명을 부르셨고, 항상 집안에 붙어있는 내가 못마땅하셔서, 머스마가 나가 놀아야지 집에만 있냐고 항상 야단치셨다.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무렵부터 거의 항상 진통제를 드셨다. 어디가 그리 아프셨는지 몰랐지만 그 진통제를 사러 옆마을로 심부름을 많이 다녔다. 한밤중에 새벽에 깨우셔서 무섭던 고개를 지나 자고있던 옆마을 약방 아저씨를 깨워서 약을 사 온적도 있었다.

6학년이 되고 2학기가 시작되지 않았던 얼마후, 할머니는 서울을 올라간다고 가셨고 그 후 살아서 뵐 수가 없었다. 다만 아파서, 치료를 받으러 서울로 올라간다는 말을 들었는데....당연히 돌아오실 걸로 생각했다. 그 때의 나는 죽음이라던가 이별이라던가, 그런것을 인식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기에.

할머니 상을 치르면서, 수의를 입을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막상 관이 나오고, 친척분들이 울며 매달리는 것을 보고 울었던것 같다. 슬퍼서라기보다는 주변 사람들이 우니까 울었을것이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이것이 전부다. 나중에 내가 좀 더 자란 후에, 할머니가 나를 무척 걱정하셨다는 말을 들었고, 또 당신이 돌아가시면서 내게는 지금 이곳, 대전으로 와서 살게 되는 새로운 전환기가 찾아왔다.

할머니의 무덤가에 가 본지가 오래되었다. 올해 추석때는 찾아뵈어야지..

by BSang 2012. 3. 1. 15:58